백색볼펜 / 도루묵
백색볼펜 / 도루묵
  • 취재부
  • 승인 2005.04.12 00:20
  • 호수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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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심혈을 기울인 일들이, 노력을 기울인 보람도 없이 헛되게 되면 흔히 ‘말짱 도루묵 되었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원래 ‘도루묵’은 농어목 도루묵과의 물고기 이름이다. 우리나라 근해의 수심 200~400m정도의 모래가 섞인 뻘 바닥에 몸을 묻어놓고 생활을 하는데 그래서 영어로는 샌드피시(sandfish)라 불린다. 그렇다면 ‘무너진 공든 탑’에 왜, 어쩌다 하필 생선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 그 어원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 14대 임금이었던 선조(宣祖)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피난길에 먹을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 때, 한 어부가 ‘묵’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바쳤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임금은 먹어보고는 그 맛에 반해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나 궁궐로 돌아온 임금은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어보았더니 그 때 맛이 아니었단다. 그리하여 선조는 ‘도로(다시) ‘묵’이라고 불러라’고 말했고, 거기에서 ‘도루묵’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 전해지는 설화는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제법 그럴싸하다. 애꿎은 도루묵만 ‘말짱’ 뒤에 붙어서 부정적인 뜻의 이름으로 변한 셈이다. 그렇다고 생긴 게 볼품없거나 맛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선조가 하사한 ‘은어’라는 이름은 은빛 비늘을 가지고 있어 내린 이름이었고 살이 연하고 담백해서 통째로 구워먹고 튀겨먹고 찜쪄먹고 한단다. 이만하면 이름에 걸맞지 않게 훌륭한 셈이다.
△ 지난 주 식목일에 재난 사태가 내려질 만큼의 큰 불로 인해 강원도 산간 일대가 다 타버렸다. 몇 십, 몇 백 년을 살아온 나무들은 물론이고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유명한 낙산사도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60년 동안 열심히 나무 심으면 뭐하나.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말도 ‘말짱 도루묵’ 앞에서는 꼼짝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데. 새삼 도루묵의 신세가 가엾다.
<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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