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줄빳다’ 댓수 헤아리며…
화경대 / ‘줄빳다’ 댓수 헤아리며…
  • 김행철
  • 승인 2005.05.17 00:20
  • 호수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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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대학입시라는 것이 있던 시절이었다. 전기대학 낙방, 후기대학 또 낙방. 고통스럽기만 했고 아무것도 건진 것은 없던,,쩝,,재수 끝에 전기대학 또 낙방, 간신히 후기대학 합격. 그렇게 천신만고 우여곡절을 다 겪고 들어온 대학이었다. 그때는 대학생들의 가슴에 뺏지라는 것이 달려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뺏지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입시가 천신만고 였었든 말았든 간에, 또 뺏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든 말았든 간에, 그 시절 ‘학생 모임(지금은 동아리라 부르던데…)’들의 빳빳했던 위계질서와 군기 하나만큼은 특전사나 해병대 저리가라였었지 싶다. 신입회원 환영회에서부터 각종 엠티, 워크샵의 프로그램으로 ‘군기확립’과정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떤 단체는 코가 비뚤어질 만큼의 말술 퍼앵기기기로, 어떤 모임은 비지땀 삘삘 흘리는 산악훈련으로, 어떤 동아리는 엉덩이에 피멍이 맺힐 만큼의 줄빳다 세례로… 등등
군기확립 프로그램의 효과는 막강한 군기로 나타났고, 상하간의 확실한 위계질서로 나타났으며, 선후배동료를 막론하고 가족이나 친구이상의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끈끈한 의리로 나타나기도 했었는데, 퍼앵긴 술의 양이 많을수록, 엉덩이에 갖다박은 빳다의 댓수가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 더 확실한 효과를 보여 주었던 것이 은근슬쩍 증명되기도 하고… 어쨋든 그런 시절이었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학교 뺏지 보다는 각 모임의 뺏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기를 더 좋아하지 않았었나 싶기도 하다. 우선 나 부터도 대학뺏지를 가슴에 달아본 기억은 별로 없어도 단대신문이 준 금빛 찬란한 와당문 뺏지는 항상 가슴 어느 쪽에선가 당당하게 붙어서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박정희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보통국민들이나 학생들이나 정치인들이나 군인들이나… 누구라 할 것없이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씩은 다들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들 가는 거였던 모양이었다.
최근에 어떤 개그맨 한 사람이 후배들 군기 한번 잡는답시고 빳다 한번 들고 설쳤다가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저 나이였던 시절이 지금보다는 좀 좋은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을 슬쩍 느꼈었었다. 그리고 이 착각이 나 혼자 느낀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동창녀석들과의 술자리에서 확인하고는, 문득 섬뜩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동창녀석들은, 그 시절 우리들의 엉덩이에 작열했던 줄빳다의 그 처절했던 고통을 그냥 아름다웠던 추억으로만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억지로 퍼마셔야 했던 세숫대야에 담긴 소주와 그걸 퍼마신 다음 필연적으로 따랐던 그 구역질의 더러움과 가슴쓰림을 그저 아름답던 젊은날의 추억으로만 꾸역꾸역 개워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녀석들은 겉으로야 빳빳했던 군기와, 선배 말 한마디면 알아서 슬슬 기었던 후배들의 충성심, 그런 것들을 은근히 그리워 하면서, 요즘 끗발 꽤나 잡았다고 도대체 질서도 없이 인권, 복지, 분배, 참여 어쩌고만 해쌓으면서 끙끙대는 저 어린 집권자들의 땀방울을 은근히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처절했던 억압의 고통은 어느새 쌔까맣게 까먹은 채 그때가 좋았었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다.
김행철<(주)유알어스/CEO>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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