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 의미란 무엇인가
백묵처방 / 의미란 무엇인가
  • 한정한
  • 승인 2005.05.24 00:20
  • 호수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정 한 교수
<인문학부 국어국문학전공>

의미란 무엇인가

‘오인숙’의 <고슴도치 어미의 사랑> 중에는 시간과 삶의 의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시간은 꿰인 구슬더미가 아니라
한 알 한 알 낱개의 구슬이다.
삶에 의미를 찾는 사람만이 시간을
엮을 끈을 찾는다.
시간의 구슬을 엮는 사람은 시간을 겸허하게 대한다.
그는 구슬을 잇는 흐름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은 낱개의 구슬로, 그리고 의미는 그러한 구슬을 이어 주는 끈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시간이란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매우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 준다.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시간이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순수지속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시간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멸종한 뒤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시간을 측정하는 인식 단위로서의 시간, 예컨대 ‘오늘 오전 7시’라는 시간이 저 순수한 지속으로서의 시간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서울의 오전 7시가 뉴욕의 오전 7시와 결코 동시적이지 않으며, 어제 오전 7시와 오늘 오전 7시가 ‘같다’는 우리의 인식은 시간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천부당 만부당한 거짓이다.
즉 한 알 한 알 낱개의 구슬은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무한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의미를 찾아 헤맨다. 우리는 의미가 없는 것에 이름을 주지 않으며, 의미가 없는 문장을 만들기를 꺼리며,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을 ‘시간을 버렸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 의미는 물리적 시간에 생명을 주어, 살아 있는 시간, 통제할 수 있는 시간, 창조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준다.

무의미한 생활을 반복하던 젊은이가 장래 무엇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그의 시간은 의미 있는 내용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며, 오늘 오전 7시와 내일 오전 7시는 그러한 의미의 흐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맺어진다. 구슬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구슬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 구슬의 끈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겸허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언어학’의 한 하위분야에 ‘의미론’이라는 것이 있다. 낱말의 의미, 문장의 의미, 문맥의 의미, 그리고 궁극적으로 의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하는 학문분야이다. 20년 전 학부시절 나는 이 희한한, 그러나 뭔가 매우 끌리는 이 과목이 내 삶의 의미를 찾아 줄 거라는 황당한 기대로 수강 신청을 했다.
물론 그 때의 교수님은 내게 어떻게 살라 하는 답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모든 낱말(기호)들이 그것의 물리적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흔히 기호(sine)와 지시물(referent), 개념(concept)의 의미 삼각형(Ogden & Richards, ‘Meaning of meaning)으로 부른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시간’이라는 기호는 한편으로 물리적 시간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지 세계에만 존재하는 심리적 시간, 즉 ‘개념’으로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란 바로 후자의 개념이며, 물리적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이다.’라는 문장은 어떤 물리적 사건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예컨대, 대학 학생증을 가지고 있다던가, 이번 학기 등록금을 냈다던가, 강의실에 들어간다 등) 우리는 그 물리적 사건만을 ‘나는 대학생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온통 개념으로 쌓여 있다. 이미 존재하는 많은 낱말들, 이미 말해진 많은 문장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낱말과 문장들이 나의 입을 통해, 나의 손을 통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말해지지 않는 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누구나 다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중한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