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경대 / 고졸 노무현 vs 대졸 전여옥
화경대 / 고졸 노무현 vs 대졸 전여옥
  • 김행철
  • 승인 2005.08.30 00:20
  • 호수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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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각하’는 내 형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시다. 내 형은, 인구5만의 작은 어촌 삼천포 시내에서는 다시 태어나기 힘든 천재라고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그랬기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부산으로 유학(?)해서 1963년 당시 부산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문중의 명문으로 인정받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었다.
한나라당의 전여옥대변인‘님’은, ‘박정희대통령’이 죽고, ‘육군소장 전두환’이 슬그머니 정권을 집어먹었던 그 1979년에서 1980년 사이의 안개정국 당시, 명문 이화여자대학교의 학보사 편집장이었다. 그때, 이른바 ‘전대기련(전국대학생기자연합회)’의 창설멤버로서, ‘박통’의 독재정치에 매우 분노하면서 “민주화~ 민주화~” 엄청시리 부르짖었던 사람이었음을 나는, 그 전대기련의 같은 멤버로서, 바로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분명히 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1963년 당시는, 우리나라의 학력통계가 말해 주듯이 고등학교에만 진학을 해도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더구나 김해 농촌 촌놈의 자식이나 삼천포 어촌 뱃놈의 아들 따위가 부산까지 유학을 가서 명문 ‘부산상고’에 합격을 했다는 것은, 플래카드 내걸어 놓고 동네잔치 벌일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었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나 내 형에게 있어서 대학은, 결코 ‘실력이 없어서 못간 곳’이 아니라 부모님의 고생이나 가정형편을 감안해서 ‘안간 곳’이었음을 나는 우리 형의 바로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분명히 알고 있다.
전여옥 대변인‘님’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하셨던 1977년 혹은 1978년 당시, 구로공단과 청계천에서는 ‘전여옥’과 꼭 같은 또래의 여자들이, 안갔는지 못갔는지는 모르지마는 대학구경도 못한 채,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청계천의 전태일열사가 온 몸에 불을 붙이고 ‘노동조건’을 부르짖으며 장열히 산화했던 그 순간에도, 통키타 딩딩거리며 막걸리에 젖어있던 일단의 ‘생각없던 대학생님’들은 구로공단과 청계천의 동갑내기 또래들을 그저 대학도 못간 ‘공돌이’ 혹은 ‘공순이’라 부르며 은근히 코웃음치곤 했었던 것이 바로 1978년이나 1979년 당시의 모습이었음을, 나 역시 그런류의 대학생‘놈’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정권을 훔친 전두환이 저녁9시 “땡~” 하자말자 뉴우스의 첫머리에 무조건 등장하던 그 악명 높던 “땡뉴우스”시절, 땡 뉴우스의 원흉인 KBS에서 오랫동안 기자생활 하셨던 분이 바로 ‘전여옥대변인님’이시고, 박정희,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던 군사정권에 항거했던 이른바 ‘386시대’에 노무현대통령‘각하’께서는 인권변호사의 길로 슬그머니 접어들게 되었던 사실이야 다 아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과거에다가 역사라고 이름 붙여서 되는건지 모르겠는데, 역사라는 것, 참말로 재미있다. 노대통령과 전대변인의 과거역사만 놓고 보더라도 이렇게 재밌지 않은가 말이다.
박정희타도가 지상 목표였던 시대, 그냥 대학생이 아닌, 학보사의 편집장이라는 ‘의식화학생’이었던 여대생께서, 오늘날 박정희의 딸인 야당대표 옆에서 그녀의 ‘입’ 역할을 맡아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역사를 보는 재미이고, 그 ‘입’을 이용해서 대통령이 고졸밖에 안된다고 씹고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역사를 보는 재미이며, 과거사의 청산을 부르짖고 있는 ‘고졸 대통령각하’를 향해 경제가 더 급하지 그까이꺼 과거사를 왜 자꾸 들먹이냐고 딴지를 거는 ‘대졸 인텔리 전여옥’을 보고 있는 것도 역사가 주는 재미중의 재미 아니겠는가 말이다.
워따메~거시기... 참말로 재밌는거~~
김행철<(주)유알어스 대표>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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