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인도차이나를 기억하십니까?
<백묵처방>인도차이나를 기억하십니까?
  • <>
  • 승인 2003.03.16 00:20
  • 호수 108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죄송스런 일이다.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이전 나는 조그만 시골읍 외곽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대도시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만 2차 대전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산골에 피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5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매일 밤 멀리 바라 보이는 높은 산 중턱에서 피어오르는 붕화불 같은 것이었다. 나는 밤에 어머니와 함께 마루에 서서 산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하였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무슨 불이냐고 물었더니 빨갱이(빨치산)불이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밤에는 빨치산들이 읍내를 습격하고 그 다음날 아침 경찰서 앞마당에는 지난 밤 동안 죽은 빨치산 시체들이 가마니에 덮혀 있었다. 뒤어어 낮에는 경찰들이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줄을 지어 논두렁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 갔으며 그 중 몇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나의 어린 시절은 극심한 좌·우 대립과 뒤이은 살육 그리고 아무 죄 없는 양민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얼룩졌었다.
세월은 흘러 1975년 나는 유학중이던 프랑스에서 구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챠이나, 즉,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최후의 날을 맞이하는 것을 매스컴과 피난민을 통하여 생생하게 듣고 볼 수 있었다. 월남이 패망하던 날 그전까지 사이공 정부 (지금의 호치민 시티)고위 관리의 아들이 묵던 대학기숙사에 갑자기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는 세상이 변하였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사이공 함락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우익이었고, 사이공 해방이라면 좌익의 표현으로 곧 구별이 되었다.
월남패망 바로 이전에 공산화되었던 캄보디아는 인류 역사상 최대 비극의 진원지가 되었다. 미국 지원을 받았던 부패한 론·놀 정권은 무자비한 크메르 루즈 공산군에 의하여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700만 국민 가운데 250만명이 살해되어 영화 킬링 필드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론·놀 정권의 군인(사병포함), 경찰, 공무원과 가족 그리고 모든 친인척이 살해당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반동이라 하여 인민재판을 통해 즉결처분되었다. 세상에 한이 맺힌 못 배우고 가난한 크메르 루즈의 어린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질넜다.
불교정신에 입각한 선량하기 짝이 없던 캄보디아인들이, 더욱이 동양의 파리라고 하여 칭송받던 수도 프놈펜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뒤를 이어 라오스가 적화되었고 곧이어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될 때 하노이 공산 정부는 베트남에서는 캄보디아처럼 대량학살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여 다소 안심을 시켰다.
그러나 인도챠이나의 비극이 결국 패자에게는 죽음 아니면 보트피플을 승자에게는 군림을 의미하였다. 바로 1975년 인도챠이나의 비극 이후 프랑스 학생들은 나를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 보았다.
당시 이곳에서는 태국은 3개월, 한국은 6개월 후면 공산화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나도 곧 피난민으로 프랑스에 피난처를 구걸하는 처참한 상황이 될 것으로 보았다. 슬픈 눈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프랑스 학생들에게 나는 분명히 밝혀두었다.
당시의 월남(베트남)은 철저하게 부패하였지만 한국은 밑바닥까지는 썩지 않았다고 말이다. 여러 해가 지나 공부를 마치고 1981년 귀국할 때 프랑스 친구들은 나를 측은하게 여기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나서 귀국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인도챠이나처럼 한반도가 공산화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보트피플이 될 경우 프랑스 국적은 생명을 보전한다는 논리였다.
한편으로 감사하기 하였지만 상당히 불쾌하여 순각적으로 대꾸하기를 몇 년 후에 평양 시장이 되어 돌아올테니 두고 보자고 큰 소리쳤다. 결국 평양시장 대신 단국대 조교수가 되어 다시 프랑스 땅을 밟았다.
프랑스 학생들과는 달리 공산화되어 조국을 잃은 인도챠이나 학생들은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심정에는 당신은 그나마 돌아갈 수 있는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2003년이 되었다. 지금 국내는 2030과 5060 또는 자유시장경제 주창자와 민족과 통일 최우선주의자 사이에 골은 깊어지고 있다. 과거의 판단기준과 진리는 애매모호해지고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민족과 통일이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에서 퇴색해 가고 있다. 과연 지금은 늙었을 그 옛날 프랑스 대학 동창들은 아직도 작고 가나한(당시에는)나라에서 온 킴이라는 학생을 기억하고 있는지…1980년 대 초 그들의 충고가 다시 생각되어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쓴 웃음만 나온다.

김시경 교수<상경대학장/교수>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