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 황칠복(黃七福)단장의 눈물
백묵처방 / 황칠복(黃七福)단장의 눈물
  • 권용우
  • 승인 2005.10.11 00:20
  • 호수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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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처방

권 용 우 교수
<법과대학>

황칠복(黃七福)단장의 눈물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조국통일의 염원 속에 살아왔습니다. 서로를 쓰다듬으며 살아도 모자랄 타국, 그것도 일본에서 한 핏줄이 한반도가 두 동강 나듯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져 반목과 갈등으로 보낸 반세기의 세월을 어찌 말로써 다 표현해 낼 수 있겠습니까”.
지난 9월, 우연치 않게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 오사카에 들렀다 만난 황칠복(黃七福·84세) 전 재일거류민단 단장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 곡절 끝에 일본 땅에 발을 디딘지 70여 년, 지난(至難)한 세월과 풍진(風塵) 세상 속에서 팔순을 넘긴 황 단장 생애의 마지막 희망은 조국통일이었다. 붉어진 눈자위로 언뜻언뜻 비치는 조국통일에의 열망은 5일간 ‘21세기 한민족의 비젼과 평화통일을 위한 새로운 리더쉽’이라는 주제로 오사카를 달군 연사(演士)들의 열변(熱辯)보다, 대양(大洋)을 짊어지고 떠오르는 오사카의 붉은 태양보다 더 강렬했다.
이번 일본 여행의 목적은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이 주관하는 ‘평화통일 한국 지도자 세미나’의 참석에 있었다. 25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오사카에서 개최되었는데, 남북한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고조되고, 때마침 북핵(北核) 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찾기 위한 베이징(北京) 4차 6자회담도 타결되고, 세미나의 주제도 시의적절해 지인(知人)의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특히 유년시절 참담했던 6·25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통일을 위한 길’, ‘일본에서의 통일 운동’, ‘초종교운동을 통한 중동평화’, ‘재일동포의 평화통일운동’이라는 세부 주제가 마음을 움직였고, 한번쯤은 강연을 들어보고 싶은 호기심도 일었다.
첫날부터 연사들의 강연내용은 절절했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한국회장을 맡고있는 윤정로회장은 ‘통일을 위한 길’에서 “좌우익(左右翼)의 분열로 인한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수십만명의 전쟁고아(戰爭孤兒)와 1천만명이 넘는 이산가족(離散家族)을 생겨나게 한 민족의 한(恨)”으로 시작 된 강연은 참석자들의 숨소리조차 멎게 하였다.
이어 “전쟁의 당사국인 남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UN의 깃발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의 인명과 재산적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전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의 피맺힌 절규(絶叫)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하고 있다”며 “6·25는 김일성의 착각에 의한 남침(南侵)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음에도 아직 남한땅에는 좌파사상(左派思想)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미 스스로 패망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망령이 살아나 활개치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허리 잘린 한반도의 통일이 민족의 염원이라면 그 통일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지를 분명히 제시해준 열강(熱講)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재일동포의 평화통일운동’이라는 주제강연도 있었다. 반세기 넘게 이념의 올무에 발목이 잡혀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져 반목과 갈등으로 점철되어 왔던 재일동포 사회에도 평화통일로의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2004년 7월 4일 도쿄(東京)에서 민단과 조총련의 간부 수백명이 한자리에 모여 ‘평화통일연합’이 창설되었고, 수백회의 통일강연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참석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익함도 많았지만 즐거움 또한 컸다.
4박5일간 오사카에 머물면서 김기홍(전남 장흥군 문화원 운영위원), 태현실(영화배우), 서종환(대한소프트볼협회 회장) 제씨들과 어울려 오사카조(大阪城), 도다이지(東大寺) 등을 돌아보며 교분을 쌓은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오사카조의 중심에 위치한 덴슈카쿠(天守閣)에서 내려다 본 오사카는 ‘물의 도시’라는 말에 어울리게 사방(四方)이 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덴슈카쿠는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천하를 통일한 후 오사카조를 구축하고 세운 누각(樓閣)이었다. 높이가 55m나 큰 규모의 누각이었는데, 사방을 높은 성(城)으로 둘러쳐서 적을 막았다. 누각의 7층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품(遺品)을 전시하여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흔적도 남아있어 반면교사(反面敎師) 하는 계기를 가졌다.
도다이지는 천하태평(天下泰平), 만민풍락(萬民 樂)을 기원하며 728년에 세워진 긴쇼산지(金鐘山寺)에서 연원했으며, 그 후에 긴코묘지(金光明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745년에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천년 고찰(古刹) 답게 거닐기만 해도 고찰이 내뿜는 풍미( 美)
에 흠뻑 젖어들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백미(白眉)는 황칠복 단장과의 만남이었다. 우리대학에서 1979년 2월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해 더욱 마음이 끌리기도 했거니와, 그의 뼈에 사무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일에의 절규는 아직도 내 귓가를 울리고 있다.
“통일이여 오라.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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