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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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재철 교수
  • 승인 2006.05.09 00:20
  • 호수 11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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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처방
강 재 철 교수
<문과대학·국어국문학전공>

‘사불범정(蛇不犯井)’과 ‘사불범정(邪不犯正)’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또 한바탕 들썩였다. ‘민생법안’을 강행처리 하려는 여당과 이를 막으려는 제1야당이 날 선 대치 끝에 6개 법안이 마치 프로바둑 기사들의 속기대국(速碁對局)처럼 본회의를 통과했다. 뭐 이런 국회의 행태(行態)를 하루 이틀 봐 온 것은 아니지만 사사건건 육두문자(肉頭文字)를 써가며 멱살잡이를 하는 국회에 신물이 난다.
겉으로야 모두 국민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우는 그네들이지만 문외한이 언론을 통해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국민을 위한다는 법안이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논리나 상황논리에 따라 기본이 안 된 설익은 판단으로 수시로 말을 바꾸어 밀어 붙이는 행태가 아이들에게 수시 때때로 말을 바꾸던 어느 훈장과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뱀 한 마리가 우물가에 나타나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놀라 훈장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告)했다. 훈장은 아이들에게 결연하게 ‘사불범정(蛇不犯井:뱀이 우물을 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이니라 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뱀이 우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다시 아이들이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자 이번에는 근엄하게 ‘사필귀정(蛇必歸井:뱀은 반드시 우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이니라’ 라며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뒤집었다.
아이들이야 훈장님 말씀이니 말이 바뀌었어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뱀 두 마리가 나타나 서로 꼬리를 물고 우물가를 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또 허겁지겁 훈장에게 달려가 물었다. 훈장은 이번에도 확신에 찬 어조로 ‘파사현정(把蛇懸井:누군가 뱀을 집어 우물 난간에 걸어 놓을 것이다)이니라’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훈장은 그때그때마다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을 하였으니 맞을 턱이 없었다.
우리나라 국회의 행태와 제멋대로 판단해 시행되는 국가정책들은 어느 훈장의 ‘사불범정(蛇不犯井)’, ‘사필귀정(蛇必歸井)’, ‘파사현정(把蛇懸井)’식 판단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이 정부 들어서 아파트 값만은 꼭 잡겠다며 제정 공포된 크고 작은 20여 차례의 부동산 정책을 보라. 값을 잡기는커녕 되레 다락같이 올려놓았고,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집 값 안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며 훈장(勳章)을 주었으니 이만한 ‘사불범정(蛇不犯井)’, ‘사필귀정(蛇必歸井)’식 판단이 어디 있겠는가.

정부의 표현처럼 ‘핵폭탄급 정책’에도 내리기는커녕 천정부지로 오르자 교육당국까지 나서 학군 때문이라며 강남북 학군을 뒤섞겠다는 발상까지 하였으니 이 또한 ‘파사현정(把蛇懸井)’식 판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법(法)자는 물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도와줌을 뜻한다. 그래서 국가정책은 물 흐르듯 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의 정책들은 정당의 잇속에 눈이 어두워 무조건 ‘제 논에 물대기식(我田引水格)’이니 혼란스럽기 그지없고, 부작용만 더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오르면 공급을 늘려 주면 되고, 오르는 원인이 학군 때문이라면 반대쪽 학군의 교육의 질을 높혀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게 갑남을녀(甲男乙女)도 다 아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닌가. 이제는 부동산을 잡았다고 크게 확신하는 사이 서민들의 전세나 월세가 마구 뛰고 건설경기가 급속히 냉각되어 서민들의 일자리가 주는 등 부작용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최상의 선책(善策)은 물과 같은 것(上善若水)일 게다.
주지하다시피 본래 사불범정(蛇不犯井)은 사불범정(邪不犯正)으로 ‘사악함(邪)은 바름(正)을 결코 이기지 못함’을 이르며, 사필귀정(蛇必歸井)은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만사(萬事)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감’을 뜻한다. 그리고 파사현정(破蛇懸井)은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사도(邪道)를 쳐부수고 정법(正法)을 나타내어 널리 펼침’을 뜻한다.
우리 모두 본래 문자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정작 이런 문화를 이끌어가야 할 여야 정치판은 권력만 잡으면 남의 논의 물을 끌어다 제 논에 물 대려고 무언가 바꾸기에만 급급하니 작금의 한심한 행태가 되풀이 되고, 따라서 혼란만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여야의 정책들이 어느 훈장처럼 기본이 안 된 설익은 당리당략성 정책인가 수성(水性)에 충실한 선책(善策)인가 두고 볼 일이다.
바른 이치로 바르게 법을 펼쳐 가는 정치문화가 그리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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