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두가지 시각
백묵처방 -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두가지 시각
  • 성의제 명예교수
  • 승인 2006.05.16 00:20
  • 호수 117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 의 제 명예교수
<문과대학·중어중문학전공>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두가지 시각

나는 자주 중국을 왕래하는 편에 속한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1960년대, 내 나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젊은 시절에 대만으로 유학을 가서 몇 년 동안 중국문학을 배웠다. 그 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 30여 년 간 계속 대학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강의하다가 정년 퇴직을 했다. 그런 까닭에 주위에서 그 분야의 대가요 원로라고들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중국문학이 워낙 심오하고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학문일 뿐만 아니라 지대물박(地大物博)한 중국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털끝만치도 가져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중국은 이렇다, 중국은 저렇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 지면서 열등의식을 가지게 된다. 절대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어를 우리말 구사하듯 하고 또 중국음식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중국을 방문한다. 대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대륙의 내몽고·신강성·운남성·사천성·동북 삼성 등 이곳저곳을 이런 일 저런 일로 어지간히 돌아다닌 셈이다.
나 하나 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나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많이 드나든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만나는 사람 가운데 중국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산골 마을과 면(面)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친목계나 회갑 또는 칠순기념으로 다녀왔고, 젊은 층은 젊은 층대로 이장(里長) 협의회나 여타의 모임을 통하여 부부동반으로 중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우리 마을 노인회 회원들 가운데서도 고령자와 거동이 불편한 몇 분을 빼고는 거의 다 다녀왔으니 말이다. 농촌 사정이 이러니 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쁜 사람과 체력이나 경제력에 여유가 없는 일부 극소수의 사람 및 초·중·고등학생을 제외한(그 중에서도 다녀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반수이상, 반수이상이 과장이라면 삼분지 일 이상이 중국대륙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듯 하다. 이것을 전국적으로 확대 계산해 본다면 엄청난 통계 숫자가 나올 것이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한국 전쟁 때 투입되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동원된 숫자가 1백만 명이었다니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의 연인원 숫자가 몇 배 또는 몇 십 배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여하튼 좋은 일이요, 좋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신장했다는 증거이다. 중국사람들은 선망의 눈으로 그런 우리를 바라다본다.
옛날의 중국사람들은 한국(그들의 인식에서는 고려나 조선)을 자기나라의 미개한 속국으로 간주했다. 몇몇의 식자층에서나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君子之國)이니 해가며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6, 70여 년 전 중국사람들은 두 가지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다보았다. 3·1 운동이 일어난 나라, 3·1운동을 일으킨 민족, 이 사실 앞에 그들은 우리를 괄목상대(刮目相對) 했다.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열혈 같은 애국심과 항일의거를 보고 감동했으며 이를 통하여 대리 만족의 희열을 맛보았다. 일본의 압제하에 고통을 받는 동병상련의 처지, 일본의 만행과 압제는 우리에게 보다 그들에게 더 가혹했던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애국심과 민족성이 강한 민족으로 간주해 호감을 가지고 한국사람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다른 하나는 고려봉자(高麗棒子)로 보는 시각이다. 중국 발음으로는 까오리방즈라 한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사람들은 한국인을 그들의 앞잡이로 이용했다. 경찰이나 헌병의 앞잡이가 아니면 노동판의 십장으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은 일부 사람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 저항할 줄 모르는 힘없는 중국인을 향해 몽둥이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고 해서 붙여진 불미스러운 별명인데 이에 따르는 차디찬 시각이 있었다. 최 근년의 시각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해 온 나라의 의식과 국가의 틀을 완전히 개혁해 낸 나라,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로 보고 부러워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세계정세가 변화하면서 죽의 장막으로 차단되었던 중국의 문호가 개방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이제는 활발한 교류와 협력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반세기 이상의 단절로 낯설기만 했던 남조선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이제 인해(人海)의 조수처럼 무리를 지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그 많은 공항과 항구가 한국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다른 외국사람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겨우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국사람은 모두 두툼한 지갑에 가슴을 내밀고 어깨에 힘을 주고 큰 소리쳐가며 뻐기고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그 신분이 사신(使臣)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국(大國)으로 자만하는 그들의 눈물나는 괄시와 냉대에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다. 숱한 뇌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일을 볼 수가 있었던 지난날의 소국(小國)으로서의 서러움이었으니 우리들의 조상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수천년 이래 이렇게 뻐겨보기는 최근의 10여년에 불과하다. 언제까지 이런 호기를 누릴 수 있을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기간이 오래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예절과 상대방의 입장도 배려할 수 있는 수준높은 교양과 성숙된 매너가 필요할 것이다.
선망과 환영의 대상이 조소와 냉대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우리 모두의 처신과 언행에 달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