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 신동희 교수
  • 승인 2006.05.23 00:20
  • 호수 11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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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처방
신 동 희 교수
<사범대학·과학교육과>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세상 만사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처리 과정에 울분을 토하며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그 사람들이 언더그라운드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우리 대학의 부족한 점을 요목조목 지적하며 비판적 시각에서 건실한 대안을 토로하는 교수님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교수님들의 칼날 같은 비판이 깔려진 멍석 없는 술자리에서만 살아나고, 튼튼한 멍석이 깔려진 토론회에서는 사라지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평생을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묵묵히 교수로서의 권위를 지키는 선배 교수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대학보다는 군대에서 더 역량을 발휘하며 권위를 유지할 것 같은 선배 교수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전공 교수들이 각자의 전문성과 경험을 살려 협력 연구를 수행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학생 지도와 학교 업무를 수행해 나가는 학과는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 학과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학교 발전을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서 적극적, 진취적 자세로 성취해 내는 교직원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소극적, 방어적 자세로 일관하며 복지부동을 직장 생활의 모토로 삼는 교직원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소신을 가지고 고자세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경우와 서비스마인드를 가지고 저자세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경우를 구분할 줄 아는 교직원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굵고 튼튼한 동아줄 앞에서는 저자세였다가 낡고 오래된 동아줄 앞에서는 고자세로 변해버리는 교직원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완벽한 리포트, 흠잡을 데 없는 답안 작성, 멋진 프레젠테이션으로 A+ 학점을 받는 학생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완벽해 보이는 리포트가 짜깁기한 것이고, 흠잡을 데 없던 답안이 컨닝페이퍼 덕이었으며, 멋진 프레젠테이션은 번드르르하게 포장된 말솜씨에 불과했음을 알게 될 때, 나는 슬퍼진다.
기성 세대의 부조리를 지적하며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된 학생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그 학생들이 기성 세대의 부조리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때, 나는 슬퍼진다.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사람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성별(性別)을 초월해 인간을 대하는 사람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예쁜 여자에 약하고, 잘난 남자에 강한 남자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돈 많은 남자에 약하고, 능력 있는 여자에 강한 여자들도 나를 슬프게 한다.
준수한 외모, 화려한 언변, 세련된 매너를 모두 갖추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도자적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은 나를 기쁘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외형과 정반대인 그 사람의 부실한 내면은 나를 슬프게 한다.
조르지오알마니 양복을 입고, 버버리 넥타이를 매고,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캘빈클라인 선글라스를 끼고, 발리 열쇠고리로 외제차 문을 열며, 랄프로렌 폴로 향수로 마무리한 부티나는 아저씨를 보면 때로는 기쁘기도 하다. 식사 값을 지불할 때, 그 아저씨가 신은 페라가모 구두끈이 자꾸 말썽을 부리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감격하며 한 턱 쏠 시간과 장소를 잡는 귀여운 후배는 나를 기쁘게 한다. 본인이 한 턱 쏠 때는 5천 원짜리 설렁탕집에서, 남에게 얻어먹을 때는 10% 봉사료가 추가로 붙는 집만 골라 찾아가는 얄미운 후배는 나를 슬프게 한다.
만개한 봄꽃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봄꽃보다 더 싱그러운 웃음으로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은 나를 기쁘게 한다.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봄꽃과 주변 젊음들의 아름다운 기세에 눌려 옛 시절을 더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중년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젊은 시절의 사랑은 주위를 기쁘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년의 사랑은 주위를 슬프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시작 부분은 뭔가 있어 보이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오신 분들은 처음엔 기쁘셨을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분들은 지금쯤 아마 슬퍼지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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