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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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수 교수
  • 승인 2007.04.10 00:20
  • 호수 11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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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묵처방
김 영 수 교수
<문과대학·국어국문학전공>
落書二題 : 無價紙와 金剛山 觀光

(1) 아침마다 전철역 입구에는 無價紙들이 포개져 있다. 사람들은 제 물건 찾아가듯 한 부씩 들고 전철에 오른다. 몇 년 전부터 <메트로>나 <포커스>같은 무가지가 등장하더니 요즘엔 무가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일간지는 5백원을 줘야 보지만 무가지는 공짜다. 일간지는 사이즈도 크고 면수도 많으나 실제 기사는 광고에 비해 많지 않아 비좁은 공간에서 펼쳐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무가지는 사이즈도 작고, 공짜이며, 차안에서의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필수품이 된 듯하다. 차 안을 둘러보면 우리도 어느덧 독서를 즐기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느낌이다. 그러나, 무가지는 광고 형태이고, 뉴스는 공급받으며, 편집은 자유로운 형태이다. 무가지인데도 운영이 되는 것은 신기하기만 하다. 주로 광고에 의존하는 모양인데, 광고주도 적잖이 고민할거란 생각이 든다.
공정거래는 자본주의의 기본틀이다. 무가지의 난립이 일간지들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지는 의도적인 방관이라면 이는 교묘한 언론탄압이다. 신문의 사명은 정확하고 유익한 기사, 그리고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는 데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신문들도 점차 권력화 하면서 자신들의 색깔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우치거나 특정 계층과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읽고 싶은 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인위적으로 막거나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요즘 일간지들은 거대한 광고지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영상매체에 밀리면서 전면광고는 물론이고, 기사조차 거래하는 것 같은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무가지의 난립은 필연적으로 여론이나 正論의 왜곡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무가지들은 신문(?)으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이익을 극대화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무심코 집어 들면서 5백원을 벌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같은 불공정 경쟁 대신에 광고를 줄이고, 크기를 작게 하여 유익한 생활정보나 특집 및 분석기사를 실어 출근길의 독자들에게 100원이나 200원 정도에 파는 것은 어떨까? 경쟁의 룰이 깨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피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신문은 신문 본래의 사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2) 金剛山은 나뭇꾼과 선녀가 어울어진 마음의 고향이자, 백두와 한라의 중간에 위치한 민족의 명산이다. 어릴 때부터 금강산은 錦繡江山이요, 一萬二千峰이라고 들어왔다. 비록 고향이 북녘이 아니더라도 금강산은 하늘이 점지한 긍지의 표상이었다. 몇 년전부터 그런 금강산에 제한적이나마 관광이 시작되었다. 명분은 남북의 통로 역할을 한다든가, 민족의 화해분위기 조성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간 정부의 엄청난 지원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북한의 어려움을 돕자는 취지는 나무랄 것이 없다. 남북한 청소년들의 신장이 크게 차이가 난다든지, 통일 후를 대비해서라도 북한 어린이들에게 영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순수한 말처럼 들린다.
觀光은 본래 관리가 나라의 예의를 밝게 익히기 위한 수단이었다. 후대에 와서는 한 나라의 정치와 교화, 풍습을 유람하고 시찰하는 것을 관광이라 했다. 요컨대 관광은 주마간산격으로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풍습과 삶의 양식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금강산 관광은 어떤가? 정해진 코스를 돌고, 안내원의 감시(?)를 받으며, 사소한 규정위반에도 벌금을 무는 등 관광 본래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더욱이 관광의 핵심인 북녘 동포들의 삶을 살핀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통일은 가시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보다, 남북한 동포들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현재의 관광은 돈(달러) 갖다 바치고 눈치보며 조심스럽게 다녀오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남북통일의 전제조건이 민족의 화합과 신뢰구축에 있다면 이같은 관광은 게도 구럭도 잃은 일방적 헌납행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왜곡된 관광도 북녘이 고향인 사람과 이산가족에게는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는 창구가 될 수는 있다. 요즈음 우리의 북한관이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음에도 저들은 여전히 주민접촉과 같은 인적 교류는 차단하면서도 뒤로는 인도적인 미명아래 손을 내밀면서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된 배경엔 남북관계를 오염시킨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통일이라는 목표를 향해 철저히 준비하여 접근하고 호혜원칙에 입각해 추진했어야 하는데 성과에 집착한 정치인들의 조급성과 미숙함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급기야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마저 관광을 빙자한 외화벌이 통로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금강산 관광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광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후일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면 이같은 현상은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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