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그리스 고전 원전 번역에 천착한
50년간 그리스 고전 원전 번역에 천착한
  • 최정빈 기자
  • 승인 2007.05.22 00:20
  • 호수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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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원전 번역으로 신화가 생명력을 얻어 우리곁에 찾아 왔다”

천병희 (문과대학·독어독문 전공) 명예교수


세계 7위 출판시장을 가진 우리나라는 이제 번역대국이 됐다. 하지만 번역의 양만 많아졌지 번역의 질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박이라도 하듯 번역의 질에 중요성을 내세우며 원전 번역에 50년간 몰두하고 있는 천병희 명예교수가 있다.


천 교수는 1972년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정치학’을 그리스어 원전에서 우리말로 옮긴이래 그동안 40여 종을 번역해 냈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 플루타르코스의 ‘그리스를 만든 영웅들’, ‘로마가 만든 영웅들’도 모두 그의 손으로 그동안 풀어낸 책들이다.


천 교수가 평생 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고등학교 독어 선생님이 좋아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시작됐다. 독일어에 빠져들면서 서울대 독문과에 입학했고 1학년 1학기 때 친구 권유로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그리스 고전에 매혹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매혹된 고전을 천 교수는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고향에도 내려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그리스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 당시 “옥스퍼드 희영사전(그리스어-영어 사전)을 뒤져 동사나 명사의 원형을 찾아 노트에 옮기는 고된 작업을 했는데, 이미 플라톤을 읽으며 고대 그리스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심취해 있던 터라 내가 호메로스의 서적을 읽는 것을 아무도 아니 나 자신도 말릴 수 없었다”는 게 천 교수가 말하는 당시상황이다.

그렇게 무엇에 홀린 듯 매력에 빠져들어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의 유학, 그리스어·라틴어 검정시험 합격 등의 영광을 안고 귀국해 대학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유학 중 평양에 잠깐 다녀온 게 문제돼 ‘동백림사건’에 휘말리고 천 교수는 독어과 임용 석 달 만에 교수에서 죄수로 떨어지고 말았다.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고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10년 자격 정지라는 사슬에 묶여 그 뒤로도 10여 년을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천 교수는 옥중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고 생활고는 그의 열정에 풀무질을 해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원전 번역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번역은 정확한 게 생명”이라는 일념 아래 번역작업에 들어섰다. 이에 대해 천 교수는 “50년을 매달렸지만 번역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번역은 독자가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잘못된 번역은 읽는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은 물론 평생 잘못된 정보를 줄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번역은 대부분 첫 원전 번역이자 완역본이라 해설, 찾아보기는 물론 일일이 주석까지 붙여 ‘행수번역’(성경처럼 몇 권 몇 행을 찾으면 바로 원본과 대조할 수 있는 번역)이라 불린다.


고전들은 서사시가 많기 때문에 문체를 살리기 위해 그는 직역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래야 고전 문체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지론이다. 지난해 정년퇴임 후 여유시간을 갖고 하루 6시간 남짓 번역작업에 몰두하는 그는 최근에는 로마 고전문학 번역에 집중하고 있다.

숲출판사에서 라틴문학의 금빛 나는 고전이라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나왔고,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일’이 한길사에서 나온다.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도 번역이 끝나는 대로 한 권으로 묶어 낼 계획이다. 그의 손 끝에서 신화가 살아 돌아오고 있었다.

최정빈 기자
최정빈 기자

 windykik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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