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림은 1916년 평남에서 태어나 70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때까지 서양매체를 가지고 우리 나름의 토착적 표현양식을 창출하기위해 꾸준히 노력을 쏟은 화가이다. 그의 이같은 노력이 뚜렷한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던 시기는 6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 그린 작품들은 다분히 서구적 조형논리를 추종하는 듯한 양식적 전개를 보이고 있는데 비해 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부터는 향토적 정감이 담뿍어린 독특한 개성적 조형어법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영림 예술의 진수는 역시 이시기(60년대 후반부터 임종때까지)의 작품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심청전」이나「장화홍련전」등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를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으로 그렇지 않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소박하고 따뜻한 토속적 향취를 느끼게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제의 채용이 최영림의 그림을 향토적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우리 전래의 설화에서 주제를 채용하고 있다는 점만으로 그림이 향토적 개성을 지닐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영림의 회화가 향토적 개성의 창출에 성공한 이유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소화시키고 있는 조형어법의 자연스러운 안출에 있다. 그는 먼저 캔버스에 직접 흙과 모래와 접착제를 섞어서 골고루 바른 후,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캔버스에 비로소 그림을 그리는데 이러한 황토색조의 바탕이 지니는 자연적이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는 최영림회화의 토속적 개성을 형성케 하는 기초적인 정조가 되고있다. 그는 바탕으로서의 흙과 모래가 섞여져서 자아내는 우툴두툴한 마티에르와 황토색조를 최대한 살리면서 그 위에 선을 긋고 색을 칠해 나간다.
그의 회화에서는 흙과 모래가 이루는 바탕은 단순히 화가의 의도에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만 하는 바탕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능동적 감성의 장이다. 이에대해 최영림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의 에스키스나 데생이 없다. 캔버스 바탕에 흙과 모래를 섞어 형태없는 어떤 분위기의 바닥을 만들어 놓는다. 이 바닥을 들여다보면 천천히 상이 떠오르며 어떤 형체가 구체화 되어간다. 이때 오일 페인팅을 시작한다.』
이렇게하여 떠오른 상에 의해 화면에 그어지는 선의 움직임은 조형적 밀도를 지니면서도 자연스럽고 소박하다. 이러한 선의 쓰임은 60년대 후반부터 작가의 임종시(85년)까지 계속되는데 이시기의 선묘는 많은 변화를 거쳐 이룩된 것으로서 50년대의 굵고 진한 표현주의적 선의 움직임에서 60년대 중기까지의 기하학적 변형의 영역에 머무는 선의 쓰임을 거쳐 새롭게 체득한 보다 엄숙한 경지의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선의 움직임이 기본적 질서감각을 존중하면서도 보다 유기적이고 열려진 감성으로 형태를 묘출해 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화면에 그려진 형상은 자연스럽게 데포르메 되어 있는데 최영림은 그러한 변형의 과정속에 토속적인 해학성과 천진함을 조형적 차원으로 전이시켜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멋을 부리지 않고 해부학적 비례를 무시한 채 이리 저리 비뚤어지게 그려진 눈과 코와 입 등에서 특히 해학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그려진 인물들의 몸동작이 보여주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움직임이 화면에 천진스런 울림을 번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심청전에서」도 이 시기(60년대 후반에서 임종때까지)의 작품으로서 이제까지 앞에서 필자가 한 이야기는 모두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림에 그려진 장면은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려하는 장면인데 최영림은 이 상황을 슬프기보다는 축제처럼 그려놓고있다. 인당수는 그림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일 차갑고 어두운 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과 활기로 가득찬 축제의 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재생의 축제로 연결시킬 탄생의 에너지로 출렁거리는 물인 것이다.
임두빈(대중문화예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