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대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특별기획] ‘미래를 창조하는 대학 단국’의 맥박은 뛰고 있다
[단대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특별기획] ‘미래를 창조하는 대학 단국’의 맥박은 뛰고 있다
  • 이민경 기자
  • 승인 2008.03.1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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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의 꿈과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최고의 대학이 되기 위한 단국의 꿈과 도전은 이제부터 지난해 우리대학은 개교 60주년을 맞이했다. 60년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꿈과 도전’이라는 주제로 우리대학의 60년사를 다시 조명해본다.

 

▲ 개교 당시의 낙원동 교사 전경

▲‘창학’, 희망찬 꿈을 안은 단국의 첫 도전
1947년 11월 3일 ‘단국’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대학은 ‘창학’이라는 역사적 발걸음을 뗀다.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 독립을 위해 힘쓰던 범정 장형 선생과 혜당 조희재 여사는 온갖 고초와 고통과 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분은 국가의 자존을 위해서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뼈저리게 느껴 우리대학을 창학하였다.

 

우리대학의 교명을 살펴보면 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단국’이라는 교명은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이 민족의 동질성을 지켜갈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는 설립자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창학이라는 부푼 꿈도 잠시,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우리대학은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분단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무사히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리고 휴전과 함께 신당동 교사로 복귀를 하게 된다.

안정적 기반을 서서히 갖추게 되면서 우리대학은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교사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추진이라는 목표도 생기게 됐다.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한남동 부지에 캠퍼스 건설은 결정했고 1957년 한남동 캠퍼스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나가게 됐다.
한남동 캠퍼스로의 이전과 함께 우리대학은 종합대학 승격이라는 또 다른 도전을 시도했다. 종합대학 승격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우리대학의 숙원사업이었다.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종합대학 승격을 강력히 추진한 결과 66년 12월 30일 종합대학 승격안이 통과됐고 다음해인 67년 2월 10일 정식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 장충식 총장이 천안캠퍼스의 발전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내곡동 부지개발 좌절, 수도권 캠퍼스로의 새로운 도전
70년대는 우리대학 역사에서 르네상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67년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이후 우리대학은 학생 수, 교원 증가 등 양적으로 커다란 성장을 하고 있었다. 최적화된 교육을 위한 새로운 캠퍼스의 필요성이 떠오른 것이다. 이에 71년 강남구 내곡동의 22만 56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제 2캠퍼스 마스터플랜을 세우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우리대학의 도전은 정부가 부지 일대를 그린벨트로 지정하면서 가로막히게 됐다. 영동캠퍼스 건립이라는 도전은 가로막혔지만 좌절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우리대학은 제 2 캠퍼스 건립 좌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지방의 교육기회 확대와 대학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1978년 천안시 안서동에 천안캠퍼스를 건립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 2캠퍼스 시대를 연 것이었다. 제 2캠퍼스로의 새로운 도전. 우리대학 60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교의 발전을 바라보는 학생으로서의 마음은 어땠을까. 김수복(예술대학·문예창작과) 교수는 “당시 제게 있어 70년대는 학생으로서 단대신문 기자, 편집장, 편집국장으로 우리 대학의 언론 현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 대학의 꿈과 도전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총장이셨던 장충식 현 범은장학재단 이사장님께서 멀티 캠퍼스로서의 교육시설을 갖춘 ‘영동캠퍼스 건설’이라는 조감도를 펼치고 계셨다. 또 우리나라 대학 교육사에서 제 2 캠퍼스의 서장을 연 천안캠퍼스의 설립과, 지방 의료 혜택을 위한 치과 병원과 대학 건립은 바로 우리 대학의 70년대의 꿈과 도전의 현실화 한 대학사의 금자탑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대학의 70년대는 ‘미래를 여는 대학’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대학’으로서의 꿈과 도전의 맥박이 역동적으로 살아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고 당시 우리대학의 역사를 몸소 느끼고 있던 바를 얘기했다.

 

▲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 편찬

70년대 천안캠퍼스 개교와 함께 우리대학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사업이 있었다. 바로 동양학연구소를 통해 200억원이 넘는 사업예산과 30여년의 사업기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이다. 교육부의 중요 정책지원과제로 2007년과 2008년 각각 3억원씩 교육부의 추가지원금 6억원을 지원받으며 대사업의 마무리 시점에 와 있다. 77년 8월 시작한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은 우리대학과 동양학분야에 한 획을 그을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오는 9월 완간을 앞두고 있다.

 

천안캠퍼스 개교 초기 입학해 80년대 재학했었던 양은창(인문과학대학·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당시만 해도 건물이 몇 개 들어서지 않고 허허벌판의 모습이었다. 도서관이라고 해봤자 공대 지하에 마련된 협소한 공간에 얼마되지 않는 도서들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천안캠퍼스는 외관적으로나 학교 내부적으로나 비약적 발전을 거두었다. 재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학교생활에 임했으면 좋겠다”라고 바람도 나타냈다.

 ▲의과대학 부속병원 개원 ‘천안캠퍼스의 비약적 발전’

87년 10월 의예과 신설을 인가받은 우리대학은 대학재정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의과대학 부속병원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총 1800억원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부속병원의 개원은 당시 국내 병원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했다. 최고 수준의 종합병원이 설립됨으로써 인근 지역주민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제공할 수 있게 됐으며 천안시 지역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아울러 천안캠퍼스가 중부권에서 최고의 대학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학교 내적으로도 종합대학으로서의 완벽한 면모를 갖추고 제2의 도약을 준비하게 됐다.

천안캠퍼스 개교 당시 입학해 졸업 후에는 교직원으로서 천안캠퍼스의 역사를 함께해오고 있는 학생과 이홍창 과장은 “처음 천안캠퍼스가 개교했을 때만해도 시설적으론 굉장히 열악했다. 도로 공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장마철이면 진흙탕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은 발전을 거듭했고 지금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며 “이렇게 양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물론 질적인 성장도 이루었지만 후배들이 좀 더 열심히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학교의 위상을 드높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대학재단 타격과 한 마음 한 뜻으로 구교운동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대내외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우리대학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린벨트 지정으로 제2캠퍼스 건설이 무산됐던 내곡동 부지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강제 매각으로 한 차례 이미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발전을 이루고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경쟁력 있는 대학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용인시 죽전에 신캠퍼스 건설 계획을 수립, 캠퍼스 부지를 매입하였다.

하지만 천안캠퍼스 부속병원 개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고, 때 마침 97년 우리대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도탄에 빠트린 IMF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재단의 부도로 까지 이어지는 위기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 교직원, 교수 등 단국인들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오로지 우리대학을 지키고자 구교운동을 펼쳤다. 재단 부도라는 커다란 풍랑을 지나 우리대학은 다시금 창학, 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펼치게 된다.

 

▲ 센트로캠퍼스 시대 개막

▲센트로캠퍼스로의 이전, 제2의 도약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란 말이 있듯이, 재단의 부도, 공사 중단 등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센트로캠퍼스가 지난 해 8월 30일 준공을 맞이한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다시 한번 비약적인 발전을 꿈꾸게 된다. 개교 60주년을 맞아 국내 최상위권 대학인 ‘Top 5’ 반열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고 지난 해 2월 ‘글로벌 A죘 비전 2017’을 선포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특임교수제, 전공교육인증제, 졸업인증제, 학생포트폴리오 등 교수에게는 연구하고 강의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학생들에게는 졸업하기 어려운대학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면서 학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담겨져 있다. 그동안 학교발전에 있어 하드웨적인 면에 치중했다면 ‘A죘비전 2017’은 소프트웨적인 면에 치중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로스쿨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정보·미디어법’을 특성화 하여 이 분야의 인권 침해 방지 및 지적재산권 보호, 사이버 공간에서의 상거래 규제 분야 등 법률서비스를 연구하는 센터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친다. 법학전문대학원동 신축 공사, 법학전공 전임교수 확대, 최고 수준의 장학 제도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안타깝게도 로스쿨 유치에는 실패했다. 꿈이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던 로스쿨 유치였다.

 ‘꿈과 도전’, 이는 사람에게만 국한 된것이 아니라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대학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민족사학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고, 제 2캠퍼스 시대를 열고, 재단의 위기도 맞고, 캠퍼스를 이전하고, 희노애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대학. 이제 우리대학은 ‘Top 5’ 대학에 들어서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단국’의 꿈과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민경 기자 passion529@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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