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기자의 동행취재기] ‘용인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
[김은희 기자의 동행취재기] ‘용인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
  • 김은희 기자
  • 승인 2008.04.08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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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용인지역 향토유적순례(‘세중 옛 돌 박물관’ 편①)

4월 5일. 봄볕이 용인벌에 따뜻이 내려왔을 때,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부원들과 장두식 연구교수(동양학연구소)가 ‘용인문화의 원류’를 찾아 나섰다. 매달 한 차례씩 갖는 원류찾기는 우리대학 죽전캠퍼스와도 밀접성이 있어 동행취재를 하게 됐다.<편집자 주>

 

박물관, 박물관 이상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나라에는 박물관이 총 몇 개나 있을까? 국공립, 사립박물관 모두 포함 450여 개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나라 일본에는 몇 개의 박물관이 있을까? 무려 우리나라 박물관의 9배에 달하는 4000여 개이다.

우리나라는 수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박물관의 역사적인 면, 국민적인 관심차원에서도 일본에 비해 매우 뒤쳐져있다. 우리나라에서 100여 년 넘도록 오랜 역사를 지닌 박물관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물관에 대한 관심이 적은 탓에 거의 모든 사립 박물관들은 ‘당연한 듯’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정반대이다.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은 대개 10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 일본인은 특정 지역의 역사, 철학, 정서 등을 박물관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지방에 가든 그 지역 박물관부터 찾는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 박물관의 재정난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양호한 편이다.

‘세중 옛 돌 박물관’은 지난 2000년 7월 1일 개관한 국내 유일의 석물 박물관이다. 그러나 ‘당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모르고 있으며, 더불어 석물의 종류에 무엇이 있는지, 석물이 문화재로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은 조그만 석돌 하나에도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의 석물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인사동에서 석물을 거래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사동 상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안사니까 일본인한테 파는 거야, 우리도 비싸게 사온 거니까. 일본인들은 부른 대로 산다고…. 다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파는 거야”
이 말을 듣고 세중 천신일 대표이사는 ‘세중 옛 돌 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된 그 꽃처럼
이곳에서 본 돌 조각물들이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석물이 되었다.

봄 볕이 상큼했던 지난 5일 ‘세중 옛 돌 박물관’에 들어섰다.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이었다. 입구 양 쪽에 버티고 서 있는 해태상을 뒤로하고 박물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자 석물 내음이 물씬 풍겼다. 여기에 솔 향까지 더해져 지붕 없는 야외 박물관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좌우로 길게 늘어선 석물들을, 어쩌면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돌 조각들을 ‘새삼스럽게’ 관람했다. 곳곳에서 아주 쉽게 발견될 법한 석물들이 그동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다가 ‘세중 옛 돌 박물관’을 관람한 후에서야 비로소 나에게 가치 있는 작품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음 편에 소개될 호암미술관, 정몽주 선생 묘소 곳곳에서 이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모양의 석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박물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이 길게 늘어서있는 석장승들이었다. 장승의 종류에는 나무로 만든 목장승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로 만들어진 석장승도 있다. 석장승은 얼핏 보면 무인석(무관 형상으로 만든 석물)과 비슷하게 생겼다.

장승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장승은 남근숭배의 한 형태로 아들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두 번째로 음양을 조화시키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음양사상에서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이다. 음양의 조화 가운데 사람이 있으니 이것을 ‘천지인(天地人)’이라 하였다. 옛 선조들은 나무뿌리 쪽을 장승의 얼굴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 장승은 곧 양을 의미했고, 양은 하늘의 기운, 즉 남근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장승을 음의 상징인 땅에 묻는 장승제는 마을의 큰 행사로 여겨졌다. 장승제는 양의 기운을 가진 장승이 음의 기운을 가진 땅과 만나는 식, 즉 양과 음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행사였던 것이다. 세 번째로 장승은 풍수지리에서 비보(裨補: 결함 있는 곳을 보완하기 위해 장승, 솟대, 성석, 숲, 당목, 돌탑 등을 조성하는 일)로써 여겨졌다. ‘비보풍수(裨補風水)’란 풍수지리의 이치에 따라 결함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나무를 심거나 돌탑을 쌓는 행위를 뜻한다. 옛 선조들은 장승을 통해 마을의 액을 쫒고 풍수 상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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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morikam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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