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조우리(문예창작·1) 군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조우리(문예창작·1) 군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8.04.14 22:43
  • 호수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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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 ‘힘’이 있다면 지금 느끼는 행복 전하고 싶어

‘단국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 2008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등록금과 생활비 버느라 4년간 휴학…’ 조우리(문예창작·1) 군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지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평범한 대학생’ 조우리 군을 만나기란 의외로 힘들었다.

“준범이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지요? 오늘도 저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방에서 지금 막 집에 당도했습니다….”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인터뷰 약속을 두 번이나 미룬 조 군은, 어느덧 기자에게 형이라 칭하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요일 밤 12시. 이미 기사 마감 시간을 넘겨 이메일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라는 메시지를 보자 조 군을 꼭 만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한 잔 하면서 해야 할 말들이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내일(월요일) 낮술 어때?”

그렇게 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느라 4년이나 휴학을 했다는 술 좋아하는 시인 조우리 군을 죽전캠퍼스 인근 삼겹살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신춘문예에 당선된 대학생’이라는 표현 중 ‘신춘문예’보다는 ‘대학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 ‘대학생’으로서의 조우리 군에 대해 알려주세요.

▲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조우리(문예창작·1) 군
저라고 특별할 것은 없는 것 같고요, 주변의 학생들처럼 저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고 있거든요. 월, 수, 목요일은 학교(천안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고, 화요일과 금요일은 서울 금호동에 있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주말에는 따로 언어영역과 논술 과외를 하고 있고요. 사람들이 ‘습작은 언제 하냐?’고 물어보는데, 솔직히 많이 해 봐야 하루 세 시간을 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글을 쓸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차를 타고 학교를 가지만, 저보다 더 힘들게 학교를 다녀야 하는 학우들도 있거든요. 솔직히 지금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갖는 게 죄라고 생각합니다.

▲ “불만을 갖는 게 죄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똑같이 글을 써도 작가와 기자가 갖는 생각의 차이인 것 같네요. 조우리 군은 남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고 있는 편이고 그만큼 많은 각오와 망설임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지금은 학비와 생활비 마련에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 생활고에 지쳐 회의 같은 것을 해본 적은 없나요?

솔직히 저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아직까지 믿지는 않아요. 앞날을 내다본다는 게 지금 현실에 문제가 없어야 하는 거잖아요? 현실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건데, 그게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진짜 고진감래’가 어떤 건지 시험해 보고 있어요. 일부러 ‘희망’의 끝을 길게 두고 있거든요. 구체적으로 얘기 하면, 들뜨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행복이 구덩이를 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허공을 바라본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고민을 많이 하더라도 긴 시간을 두고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심사를 맡았던 곽재구 시인께서 “안정과 조화보다는 꿈과 패기에 찬 도전의식이 마음에 들었다”는 평을 하셨는데, 아무래도 시인의 삶이 정상적인 길을 밟지 않아 온 것이 시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들려줄 수 있습니까?

두 살 이후로 할머니가 동생이랑 저를 키워주셨거든요.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다른 곳(광주)에 계셨고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 있는 곳으로 가게 됐는데, 그때부터 저한텐 성장이 곧 불안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저희들 진학 문제로 불안해하시고, 저는 무리하시는 아버지 보고 또 불안해하고…. 그러면서 진학한 고등학교가 광주 전자공업고등학교라는 곳이었고, 거기서 다시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마지막으로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죠. 2003년에 우리대학에 입학하긴 했는데, IMF때 빚을 많이 지신 아버지의 사정상 한 학기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그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동생을 위해 잠시 양보를 했고요. 그때 학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돈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 『대동여지도』를 보면 ‘고독’이나 ‘삶에 대한 치열한 의식’이 보이는데, 시를 쓸 때의 상황이나 그때의 고민을 들려주세요.

작년에는 정말 하루에 한 끼 먹기도 힘들었어요. 등록금 마련하랴, 학자금대출 막으랴…. 학원 아르바이트도 손에 안 잡히던 때였거든요. 솔직히 그때 제일 힘든 건 대화 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저랑 비슷한 처지의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마치 동굴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어요. 아르바이트 하느라 시간에 쫓기고, 일을 쉬면 돈에 쫓기고, 그렇게 반 년 정도 지내다가 그냥 다 내려놓았어요. 그때 특히 많이 읽었던 시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었는데요, 자기 스스로 시작과 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시인의 마음이 남 같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고민들이 모여서 『대동여지도』가 나온 것 같고요.

▲ 주변의 환경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역시 조우리 군의 현재 모습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조 군 역시 앞으로 계속 시를 쓸 텐데, 어떤 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길 바라는 지 듣고 싶습니다.

주위 분들로부터 도움이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신의 행복마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키워주신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교수님들, 그리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강사님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먼 얘기인 것 같은데요, 만약 제가 쓰는 글에 힘이 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정도면 만족 할 수 있을것 같아요.

■ 조우리 군은
1983년 여수에서 태어난 조우리 군은 2003년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우리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을 비롯해 교육인적자원부, 광주광역시 교육청 주최 백일장 등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상했다. 가정 형편상 한 학기만 마치고 입대해야 했던 조 군은 군 복무 중에도 국방부 주최 시 문학상에 입상하는 등 꾸준한 창작 활동을 했다.

특히 전역 직후 2006년에는 동국대에서 개최한 만해백일장에서 자신이 직접 가르친 학생들이 8명이나 입상해 지도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국 젊은 작가 시인상, 미당 문학제 백일장, 영랑 백일장에서 입상한 조 군은 올해 1월엔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대동여지도』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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