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연극 ‘블랙버드’
⑨ 연극 ‘블랙버드’
  • 차윤단 기자
  • 승인 2008.05.20 14:06
  • 호수 1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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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와 불혹을 넘긴 남자의 사랑이야기

연극 블랙버드의 포스터를 처음봤을때, 자못 추상미의 연기가 궁금해졌다. 포스터 속 그녀의 울듯 말듯한 눈망울이 어떤 깊은 사연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새 맘속에서 스물스물 연민이라는 감정의 동물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정작 그 감정에 이끌려 씁쓸한 다크초콜릿 같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을때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경악했다.

추상미는 한국에서 초연되는 이 작품에서 12세 때 40세 이웃집 남자 레이(최정우)와 성관계를 가진 후 15년이 지나 다시 그를 찾아가는 우나 역을 맡았다. 12살 짜리 소녀와 불혹을 넘긴 남자의 사랑이야기가 아름다울리 만무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아니 과거에만. 그들의 사랑이 세상에 발각되기 전까지만 그렇다.

“그들은 당신이 나한테 무슨짓을 했는지 물었어. 내가 아무말 안하니깐 그들이 말해주는 거야. 한가지를 원했을뿐이래 그래서 사라진거래. 원하는걸 손에 넣었으니깐” 둘의 사랑이 세상에 발각되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순수했던 12살의 작은새는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안고 와 그의 앞에서 토로한다. “당신은 날 버렸어...” 증오와 경멸이 담긴 눈빛이 그녀의 아픔을 짐작케 했다.

허를찌르는 대사로 무장한 이 도발적인 연극은 십대초반에 이웃집 남자와의 관계, 그리고 시간이 흐른뒤의 재회의 시간을 다루며 단순한 성폭행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아픔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아픔을 넘어 남녀간의 소통문제, 사회적 잣대, 사람의 감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두 남녀의 진실 공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미스테리 멜로극에 혀를 내두를쯤 이어지는 충격적인 반전.

관객들은 소아성애자, 로리타컴플렉스를 가진 이로 세상의 손가락질 받았던 남자의 지난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보아야하는지, 욕망으로 보아야하는지 러닝타임 90분이 흘러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는 가운데 두 남녀의 대화가 오간다. “날 사랑했어요?” “그땐 그랬어” “지금은?” “…” 현재의 시점의 누군가를 만나서 과거의 그 사람을 규명하고 진실을 찾아보려했던 우나의 시도는 씁쓸한 뒷맛만 남겼다. 하지만 세상이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실험적인 공연과 감정을 쏟아내는 두 배우의 에너지에 매료되어 본 이번 연극은 탁월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차윤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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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dan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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