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스의 인어
월리스의 인어
  • 공문성 수습기자
  • 승인 2008.07.0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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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슈운지는 영화감독으로 알았는데 우연히 그의 책을 보게 되었다.
이와이 슈운지라는 브랜드와 ‘윌리스의 인어’라는 제목은 너무 잘 어울렸다. 그 사람을 옮겨놓은 것 같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윌리스의 인어’는 윌리스라는 과학자가 인어를 홍콩에서 실제로 만난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치 사실인 것처럼 책이름까지 나열하며 독자를 끌고 가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책에는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들이 많다. 일단 진화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인어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한다. 돌고래와 사람은 같은 포유류이다. 인간도 처음에는 물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진화론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돌고래는 초음파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데 돌고래의 초음파는 수 십 킬로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며, 전 세계 돌고래들은 같은 코드의 소리를 사용한다. 혹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가청주파수를 사용하는데, 돌고래끼리는 커뮤니케이션이 완벽하게 구사된다. 어느 곳에 있던, 처음 봤건 아니건 말이다. 그리고 돌고래들은 일대일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일대다 커뮤니케이션에도 효과적이라 한다. 반면에 인간은 지역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받는다. 일단 서울과 광주의 언어사용만 해도 조금 다르다. 제주도에 가면 제주도 언어는 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 발달 과정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위험해”라는 신호를 아군에게만 전달하기 위해 제한된 코드를 사용하여, 아군끼리만 인식하는 암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별로 언어의 사용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아군끼리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코드가 점차 발달하여 언어가 되었기 때문에 지역별, 국가별로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불편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고 한다. 책에 보면 인어는 돌고래보다 더 높은 주파수의 초음파를 사용하며 그 소리는 어디에 있던(책에 보면 남극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찾아 동종인어를 찾아 간다) 들을 수 있는데 인어는 이런 말을 한다. “소리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가?”라고.
소리를 시각화한다는 것인데 인간의 틀로 입각해 보면 이해가 갈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돌고래를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이 나오는데 나중에는 자신들의 결과가 반에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의 서술이 나온다.

나는 진화론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진화론을 옹호하는 사람도 아니다. 또 책의 내용이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내가 집중하는 부분은 틀에 갇힌 이해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 있고 사상이 있고, 신념이 있고 추가적으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화하여 대상을 바라보려 해도 전체를 이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자꾸 모순이 발생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일도 생긴다. 서로의 차이에서 기인한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설득하려하고 잘 못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독한 몰이해다. 그래서 같은 부류들끼리 어울리려 하는 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의 틀이 깨어지면 혼란스럽기 때문에 철저하게 틀에 의존하여서 대상을 바라보려하는 지도 모르겠다.

정말 피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사고의 강요이다. 갈등은 서로의 이해를 좁히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누군가 말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
사람들은 모두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감정을 설명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다.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좁혀나가면 점점 본질에 가까워질 것 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도 나온다.

소설은 굉장히 흡입력이 있어 몰입하게 만든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버무려놓아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참 생각 많이 하고 쓴 책이고, 공부 많이 하고 쓴 내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이야기 속에 녹였다. 결국 인어가 어찌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환상의 세계를 넓혀주려 했는지, 커뮤니케이션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 했는지, 몰이해에 입각한 강요와 모순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소설이란 장치를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 되고, 독자는 자신에게 적합한 부분을 소화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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