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에 생각나는 것들
제헌절에 생각나는 것들
  • 권용우 명예교수
  • 승인 2008.07.0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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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7일은 제헌절(制憲節)이다. 이 날은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憲法)의 제정을 경축하고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의 수호를 다짐하는 국경일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大韓國民)은 기미삼일운동(己未三一運動)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正義)·인도(人道)와 동포애(同胞愛)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民主主義) 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경제 ․ 사회 ․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제헌헌법(制憲憲法) 전문(前文)은 언제 읽어도 힘이 넘친다.

1945년 8월 15일! 이 날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5·10 총선거’에 의하여 개원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건국헌법(建國憲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되었으니, 그 의미가 참으로 크다 아니할 수 없다.

헌법! 이는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원칙을 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최고법이다. 따라서, 헌법은 가장 강력한 형식적 효력을 가지며, 모든 법규범의 원천이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헌법이 요구하는 행동방식을 존중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이로써 헌법이 국가의 최고법으로서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헌법이 걸어온 발자취는 과연 어떠했는가? 고난(苦難)의 역정(歷程), 바로 그것이었다. 때로는 정치인의 과욕에 의해서 개헌(改憲)이라는 이름으로 칼질을 당하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대통령에 의해서 ‘그 놈의 헌법’으로 조롱당하기도 하였다.

무자비하게 칼질을 당한 것은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헌법사(憲法史)에 있어서 최초의 개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를 골자로 한 국회의 개헌안과 정 ․ 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한 정부의 개헌안을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이 개헌안은 심야국회에서 거수투표에 의하여 변칙적으로 가결된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954년 11월 27일의 제2차 개헌은 ‘4사5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가 그 골자로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개헌안에 대한 국회의 표결결과는 가(可) 135표, 부(否) 60표, 기권 7표로,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부족하여 부결(否決)이 선포되었으나, 그로부터 이틀 후에 203명의 3분의 2는 ‘4사5입’(반올림)하면 135명이 된다고 하여 부결선포한 것을 취소하고 다시 가결(可決)을 선포하였다. 과욕이 불러온 불행의 씨앗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무리수가 1960년 3 ․ 15 부정선거를 잉태하고 만다. 집권당인 자유당(自由黨)의 관권선거(官權選擧), 3인조·9인조 공개투표가 유권자를 분노케 했다. 이승만(李承晩)의 장기집권을 위한 무리한 계획은 결국 4·19 학생혁명으로 이어진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示威)의 불길은 마산(馬山)을 시발점으로 해서 전국으로 급속하게 번저 나갔다. 급기야,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이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촉구하는 데모에 나섰다. 결국, 이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직하겠다”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권력의 무상함을 보는 듯 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제3차 개헌이 이루어진다. 제2공화국의 탄생이다. 12년간의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의(正義)의 승리였다. 그리고, 5·16 군사혁명으로 헌정(憲政)이 중단되었다가 민정이양(民政移讓)을 위한 제5차 개헌, 대통령 3선(三選) 금지규정을 완화한 제6차 개헌, 세칭 ‘유신헌법’(維新憲法)의 제7차 개헌, 대통령간선제를 골자로 한 제8차 개헌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에 의하여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수용되면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9차 개헌에 이르렀다. 이 개헌은 우리나라 헌정사상(憲政史上) 최초로 여·야의 대표로 구성된 대표자회의에서 개헌안이 마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대통령직선제가 채택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함으로써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선택을 보장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케 함으로써 민주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제9차 개정헌법에 의하여 제6공화국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이명박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우리는 지난 참여정부 5년을 살면서 참으로 참담한 일을 많이 경험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서를 하고 취임한 대통령으로부터 “그 놈의 헌법”이라고, 헌법이 조롱당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말이다. 우리 헌법 제66조는 대통령의 헌법수호의 책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의 입으로 “대통령 단임제, 한 마디로 쪽팔린다”는 말도 했다. 제헌절을 맞으며 허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금년은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지난 60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60년을 설계해야 한다. 지난날의 아픔과 좌절을 털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제헌절에 즈음하여, 국가의 최고규범인 헌법의 제모습 찾기에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평화적 통일의 길로 나아가자.

권용우 명예교수
권용우 명예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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