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명예총장
장충식 명예총장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8.09.02 11:08
  • 호수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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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7일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실에서 장충식(張忠植) 명예총장을 만나 취임 소감, 단국대학의 산증인으로서 우리대학의 역경과 영광에 대한 소회, 앞으로의 비전 등을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늦었지만 명예총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취임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이제 사회에서 조용히 지낼 사람에게 명예총장을 맡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여러 가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는데, 다시 대학발전을 위해 힘써달라는 뜻에서 나를 명예총장으로 추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마운 마음, 그리고 이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대학발전을 위해 힘써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천안캠퍼스가 올해로 개교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천안캠퍼스를 설립할 당시 총장으로 계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의 천안캠퍼스를 있게 하셨습니다. 소회가 남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천안캠퍼스를 처음에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물론 대학 내에서 나와 가깝게 지내던 간부들도 상당수가 왜 그러한 무모한 일을 하느냐며 말렸죠. 그래서 제가 단국대학의 한남동 터전은 우리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의 생각을 사회에 제대로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너무 무대가 작다고 했죠. 단국대학이라는 무대를 넓히고 교수나 학생들의 잠재적인 생각을 국민들에게 더 잘 알리려면 한남동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이 없는 도시에 가서 대학을 만들고, 이로 인해 지방도시의 인구를 늘리게 해 줘야 서울의 인구팽창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후진성’을 극복하는데 우리 단국대학이 앞장서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단국대학이 ‘전국의 단국대학’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천안에 캠퍼스 설립을 추진한 거죠.

그때만 하더라도 천안에 16개 치과 병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60개의 치과 병원이 있다는 것이 단국대학이 지역발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치과병원이 생기고, 지역 사회에 기술이전을 하거나 우수한 의료진이 들어가면서 지역발전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 이후 다른 대학들이 단국대학을 본받아 지방 캠퍼스 설립에 나선 것을 보면, 우리대학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대학의 60년 넘는 역사를 들춰보면 역경도 많았고 영광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영광보다는 역경을 오래 기억합니다. 명예총장님께서 각별히 간직하고 계신 우리대학의 역경과 영광은 무엇인지요.

설립자께서 생각했던 ‘대학의 젊은이’는 ‘진리탐구를 하는 젊은이’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키는 젊은이’였습니다. 단국대학이 키워야 할 대학생의 지표였고, 저에게도 늘 당부하셨던 이야기죠. 해방직후에 정규대학으로 출발한 우리대학의 이런 사상은, 그 당시 정치권에서 느끼기에 대단히 방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단국대학 설립자의 이념이 김구 선생과 같은 남북 단일 정부를 지향하는 것이었거든요. 이승만 박사가 추구했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반대되는 이념이다 보니 우리대학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야당 대표였던 장면 선생을 도운 것이 정부의 미움을 사는 요인이 됐습니다. 5·16쿠데타 이후 장면 박사가 구속되고 설립자는 반혁명 사건으로 그 당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투옥하게 된 거죠. 그 이후 군사정부가 단국대학을 폐교시킨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시련입니다. 김구 선생의 노선을 따르는 대학, 장면 정권을 돕는 대학이라는 이유로 정권에 괴로움을 주는 대학을 폐교시킨 거죠.

그 폐교된 대학을 복구시키는 일을 제가 떠맡게 됐습니다. 이때 가졌던 생각이 ‘설립자의 뜻을 살리기 위해 정부와 타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재정적으로 아무런 배경을 갖지 못한 우리대학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키는 젊은이’를 키워낼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죠. 저는 정부와 친분을 유지하되, 학생들은 마음 놓고 투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를 했죠.

아버님(편집자 주: 설립자 장형 선생) 생각을 하면 정권에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지만 앞으로 내가 대학을 키우기 위해 대통령에게 진정을 했죠. 단국대학을 폐교시킨 것에 대한 ‘보상’으로 종합대학 승격을 허가받은 게 이 때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발전을 위해 내곡동의 땅을 나라로부터 사들였죠. 그랬더니 또 중앙정보부에서 자기들한테 얘기도 없이 대통령 만나서 종합대학 허가 받았다고 잡아가더군요.

보름동안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 들어서자마자 내곡동 땅을 국정원(중앙정보부)에 뺏기게 된 거고요. 학교가 힘이 없다보니 정부에 휘둘리게 되더군요. 그래서 학교를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죠.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의과대학을 해 달라”는 이야기들을 하더라고요. 제도상 서울은 의과대학을 만들 수 없었고, 그래서 천안에 의대를 만들게 된 거죠.

마침 대통령 선거철이 돌아왔습니다. 유력 후보들 캠프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저는 “대학 총장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중립선언을 했는데, 이게 또 정부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됐어요. 아무리 정권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다짐을 했어도, 학생들 등록금을 정치자금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그건 학교를 망쳐도 보통 망치는 게 아니잖아요.

이게 미운털이 박혀서 우리가 의과대학 설립하는데 들어가는 모든 자금줄이 막히게 됐습니다. 금융계통의 지원이 전부 중단된 거죠. 미운털 박힌 단국대학을 망쳐놓는 방법으로 정부가 선택한 것은 “의과대학 만들면서 진 빚을 한남동 캠퍼스를 팔아서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남동을 팔고 천안캠퍼스로 합치라는 것이었죠.

이게 우리대학의 두 번째 시련입니다. 청와대 지시로 장관이 나를 불러서 고함도 지르고, 난 “우리나라는 청와대 지시면 다 되는 줄 아냐?”며 버티고 하다가 지금의 죽전캠퍼스 땅을 산겁니다. 천안 캠퍼스와 그 당시 한남동 캠퍼스를 합친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돌이켜보니 우리대학에는 참 불행했던 일들이 많았네요. 군사정권 들어서면서 맞이한 폐교 사태에서 최근의 이전 사업까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영광도 많았습니다. 의과대학을 설립했던 일, 천안캠퍼스가 성공적으로 정착해 개교 30주년을 맞이하고 타 대학의 모범이 됐던 일, 성공적인 죽전캠퍼스 이전사업 등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명예총장님께서는 총장으로 오랫동안 재임 하시며 단 한명의 학생도 제적시키지 않을 만큼 학생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서슬 퍼런 군사독재정권시절에도 그와 같은 초심을 유지하신 동력이 궁금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저는 학교발전을 위해 정부와 맞서는 입장이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정부와 타협을 하는 대신, 학생들을 정부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학생들은 강하게 투쟁을 하고 나는 그런 학생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 거죠. 군사정권 시절, 학생들이 붙잡혀 가면 내가 정부를 찾아가는 거죠.

시위 과정에서 비록 내 방까지 점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과정에 있어서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용기 있는 젊은이를 키우는 것이 설립자의 뜻이었고 우리대학이 길러내고자 하는 ‘젊은이’의 표상이잖아요. 단순히 학교 질서를 파괴하는 젊은이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의 싹’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희생이 될 텐데, 나는 그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의 사례가 대표적이죠. 그 당시 시위 사건에 연루돼 서울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까지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어느 대학에서도 박 변호사 받으려 하지 않을 때 우리대학만 입학 허가를 내준 거죠. 그 친구 입학 시키고 보통 괴로움을 당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정부를 돕는 사람이냐, 아니면 정부를 망쳐 놓는 사람이냐!”라는 말까지 들었죠.

이런 학생들이 우리 단국대에 많이 들어왔죠. 정권이 학생을 처벌하라는 말에 굴복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날 감옥에 집어넣을지언정, 아니면 최근 10년의 오해와 그로 인한 맘고생을 겪을지언정, 이런 일들로 인해 학생들을 원망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대학은 죽전캠퍼스로의 이전으로 중차대한 시험대에 지금 서 있습니다. 우리대학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계실 명예총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단국의 큰 길’은 어떤 길인지요.

한남동의 규모로는 강을 건너는 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태평양을 건너는 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30대에 총장 취임하면서 제가 가졌던 생각입니다. 한남동의 단국대학은 세계 어떠한 대학의 총장이나 교수들이 와서 봐도 ‘미래가 있는 대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죠. 외국의 대학 총장이나 교수가 한국의 대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기숙사나 실험실다운 실험실과 같은 교육적 환경과 기반이 갖춰져 있는가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유수의 대학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러한 대학의 교수들을 모셔 와야 합니다.

이러한 인적 교류를 하기 위한 교육적 바탕이 필요한 것이죠. 일례로, 30년간 350억 원을 들여 만든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몽골의 전 대통령이 이에 감동해서 축사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대학도 엄두를 내지 못 했던 일을 우리대학이 한 것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단국대학교 학생들은 죽전 또는 천안이라는 좁은 ‘지방적 개념’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한국을 이끌어나가고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주었으면 합니다.

 

▲명예총장으로 취임하신지 채 한 달도 안 되었지만 대학발전을 위해 어떤 조력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나는 박유철 이사장이 나를 명예총장으로 추대한 이유를 지금의 총장과 학교를 도와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도움’의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은 학교 행정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발전을 위한 ‘기금’을 끌어주는 것이겠죠. 사회 경험이 적은 지금의 총장보다는 50년 이상 사회생활을 한 내 인맥이 그런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제가 구상하고 있는 가장 큰 사업은 박태환 베이징 올림픽 수영 제패를 기념하는 수영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박태환은 4년 후면 나가야 할 텐데, 우리대학이 그 친구만 키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한 또는 더 좋은 선수를 육성하고 모집하기 위해, 그리고 대학의 지속적인 홍보를 위해 박태환 기념 수영장을 죽전캠퍼스 대운동장 지하에 만드는 겁니다.

이런 국제규모의 수영장을 만드는 데는 약 16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갑니다. 나는 단국대학에 권력은 없고, 의무만 있는 사람입니다. 단국대학을 위해 봉사하는 명예총장으로 학교 밖에서 뛸 생각입니다. 아마 박 이사장도 내게 이런 일을 맡기기 위해 명예총장 자리를 맡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단국가족에게 당부하실 말씀 있으실 텐데 듣고 싶습니다.

먼저 학교 측에 하는 부탁입니다. 앞으로 죽전캠퍼스가 교육의 터전다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해외의 많은 선진 대학과 인적·학문적 교류가 활발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시설의 보완이 필요하고, 대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단국대에 들어가면 나에게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해 줘야 합니다.

대학이 이런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희망이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학생을 등록금을 내는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미래의 국가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유능한 학생들을 우리대학으로 불러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학생들에게 하는 당부입니다. 최소한 우리 단국대학 학생들은 남북통일을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해줬으면 합니다. 북한사람들이 나한테 “남쪽에서 제일 좋은 대학 이름이 뭡네까?”라고 묻기에 “단국대학이죠!”라고 답한 적이 있거든요. “남과 북 모두 단군의 자손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일 좋은 대학 이름은 단국대학이죠”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웃더라고요.

나는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앞으로 ‘통일의 대통령’은 단국대학에서 나와야 하고, ‘통일의 일’을 만들어 가는 사람도 단국대학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큰 뜻을 품어주길 바랍니다.

 

질문자 : 임미영(식영·3) DKBS 아나운서 부장
기록·정리 : 박준범(언론영상·3) 단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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