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②아우 이진을 위한 제문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②아우 이진을 위한 제문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09.09 18:00
  • 호수 12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우 이진(은신군)에 대한 애도사(哀悼辭)

의지하던 형제의 비극적인 죽음
극진한 애도의 정을 보이는 글을 직접 지어

네 죽음은 해와 달의 밝은 빛에 의지하지 못하게 된 것

『 “아, 사람 중에 누가 형제가 없으리오만 누가 우리 형제처럼 정이 깊겠는가. 순서를 따라 서로 따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으며, 나이 차가 있어도 모여서 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하며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임오년(1762) 이후 아버지를 여읜 우리 형제들은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는데, 위로 성상(영조)께서 하늘처럼 덮어주시는 은혜에 힘입어 형제 네 사람이 서로 의지했으니, 애정이 절실하고 그림자처럼 따르던 것이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정해년(1767)에 너희 형제가 한꺼번에 궁 밖으로 나가자 궁 안에는 아직 관례와 혼례를 치르지 못한 아우 하나만 남았다. 너희 두 사람은 동궁과 길이 막혀 자주 만나지 못하고 초하루나 보름날 문안할 때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만나는 날이 적고 헤어져있는 날은 많았으니, 나는 너희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는데, 너희 두 사람은 울적하고 무료함이 또 어땠겠느냐.

(중략) 한을 머금고 애통해 하는 것은, 두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나란히 돌아오지 못하고 상여에 실린 채 북으로 돌아와 천 리에 혼을 의탁할 데가 없게 된 것이요, 한번 영주(瀛洲)로 간 뒤에는 삶과 죽음을 달리하여 형제가 은혜의 물결에 함께 목욕하고 해와 달의 밝은 빛에 의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너의 복 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웃으면서 말하던 낭랑한 너의 목소리는 항상 내 귀에 쟁쟁하고 온화하던 네 모습은 항상 내 눈에 선하다. 잠 잘 때도 너의 생각, 밥 먹을 때도 너의 생각, 어느 때인들 생각지 않으며 어느 곳인들 생각하지 않겠느냐. 끝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이 아픔이 언제 그치겠느냐. 애처로운 너의 아내는 내가 돌보겠지만 외로운 너의 넋은 장차 어디에 의지한단 말이냐. 가슴에 기가 막혀 말을 길게 하지 못하고, 조촐하게 차린 제사 음식으로 사람을 보내 대신 곡(哭)하게 한다. 영령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 슬프도다.” 』

정조가 1771년에 아우 이진(1755∼1771)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정조에게는 세 명의 아우가 있었는데, 이인(은언군), 이진(은신군), 이찬(은전군)이 그들이다. 이들 사형제는 비록 모친은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부친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로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형제애가 더욱 각별해졌다. 그러나 이인과 이진은 1767년에 궁 밖으로 나와 살림을 차리면서 형 정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었다.

게다가 이인, 이진 형제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들의 무고로 은언군, 은신군이란 군호(君號)를 삭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몸이 허약했던 이진은 얼마 후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이진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정조의 제문은 아우 이진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그를 영결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제문에서 보듯 정조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형제애를 거론하고 타지에서 요절한 아우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렇지만 아우의 죽음은 할아버지 영조의 처분으로 생긴 일이었으므로 그 책임을 거론하기는 어려웠다. 당시에는 궁 안에 있던 정조의 처지도 안정되지 못했으므로, 정치 싸움에 휘말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우에게 극진한 애도의 정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던 은신군 이진의 묘비인데,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 옮겨져 있다. 이는 운현궁에서 기증한 때문인데, 이진은 흥선대원군의 조부이자 고종의 증조부가 된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