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③정조가 소개하는 경희궁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③정조가 소개하는 경희궁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09.23 22:03
  • 호수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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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로 성장한 정조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 홍씨가 영조에게 요청
16년간 살면서 교육장이자 휴식처로 쓰인 경희궁

“흥정당 동쪽에 존현각(尊賢閣)이 있다. 이곳은 예전의 국왕들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연마하던 집이었는데 뒤에 폐지되었다. 경진년(1760)에 국왕(영조)께서 이곳으로 오셔서 나에게 이 건물에서 글을 읽게 하셨다. 주위에는 주합루와 관문루가 있고 그 옆에는 동이루와 홍월루가 있다. 그 옆에는 정색당이 있는데 옛 이름은 석음이다. 이곳은 모두 내가 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중략) 이 궁궐은 광해군 때 세워졌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 광해군 때 지은 건물들을 모두 없앴지만 이 궁궐은 원종(인조의 부친)의 잠저(국왕이 되기 전의 사저)라고 하여 없애지 않았다.

궁궐이란 국왕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들이 향하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지, 거처를 호화롭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경복궁을 짓고 다시 창덕궁을 지은 것은 국왕이 수시로 이동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우리 성종 조에는 다시 창경궁을 지어 세 분의 대비를 모셨으니, 이는 한량없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비록 경복궁은 불탔지만 세 궁궐(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있어 정치를 하는 장소로는 부족할 것이 없는데 어찌 다시 건축을 하겠는가. 나는 경희궁에 있는 여러 전각들의 현판을 고증할 만한 문헌이 없고, 정사를 보는 곳은 깊숙한 곳에 있고 출입이 엄격하여 내사(內史)의 신분으로도 그 위치와 순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을 염려했다. 이 때문에 이 지(志)를 만들어 상고할 수 있게 한다.”

▲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모습.
1774년에 정조가 작성한 경희궁지(慶熙宮志)라는 글이다. 윗글에 나오듯이 정조는 1760년부터 경희궁에 살기 시작했는데, 이때 정조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세손으로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1762년에 남편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혜경궁 홍씨는 특별히 영조에게 경희궁에서 세손을 데리고 살 것을 요청했다. 이 때 혜경궁은 창덕궁에 살았으므로 모자로서는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죽은 상황에서 세손을 보호해 줄 사람은 영조 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므로, 이처럼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까지 경희궁에서 살았다.

경희궁 시절의 정조는 학문에 몰두하는 학생이었다. 정조가 거처하던 존현각 건물은 강의실로 활용되었고, 주변에 있던 주합루, 관문루, 동이루, 홍월루, 정색당 같은 건물들은 수많은 서적이 비치된 도서관이었다. 또한 정조에게는 홍봉한, 조영국, 김양택, 서지수, 김원행 같은 뛰어난 스승들이 배치되어 직접 가르쳤다. 정조는 좋은 자질을 타고 난데다 훌륭한 교육 여건이 갖춰진 경희궁에 살면서 뛰어난 학자로 성장했다. 정조는 21세가 되던 1772년부터 저술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가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경희궁에 살던 정조는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가로운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가 말을 타거나 활쏘기를 하였고, 꽃 피는 계절이 되면 경치가 좋은 곳으로 가서 꽃구경을 했다. 영취정(暎翠亭)은 정조가 경희궁 안에서 꽃구경을 하던 정자의 이름인데, 이곳의 빼어난 경치에 대해 정조는 따로 기문(記文)을 짓기도 했다. 경희궁은 청년 시절의 정조를 길러낸 교육장이자 휴식처였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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