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④동덕회 모임의 기록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④동덕회 모임의 기록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09.30 15:58
  • 호수 1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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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을 함께 했던 정조와 신하들의 모임

영조 말년 위기에 빠진 정조를 보호했던 서명선, 홍국영 등이 주축

“모임의 이름을 동덕(同德)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우리들의 아름다운 모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동덕회의 군자들은 모두 나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 모임을 훈전(薰殿)에서 노래를 주고받거나 남궁(南宮)에서 술잔치를 벌였던 옛날의 아름답고 성대한 모임과 비교하면 즐거움은 같아도 사정은 다르다. 전날의 어려움을 항상 생각하면서 우리가 덕을 함께했던 의리를 표현하려 한다면 어찌 문자로 기록하여 오래 전해지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중략) 나는 공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종묘와 사직이 다시 자리를 잡은 날이요, 임금과 신하들이 다시 편안해진 날이다. 이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후로 매년 이 날이 되면 오늘의 모임을 이어서 모이도록 하자. 저 언덕이나 소나무 잣나무처럼 장수하길 축원하는 것은 공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고, 국가의 원로가 되고 장수하는 벗이 되길 바라는 것은 내가 공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국가가 편안해야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고, 모든 사람이 즐거워야 이 모임이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술잔이 오가는 중에도 어려웠던 때의 마음을 슬퍼하고, 담소하고 즐기면서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재기를 꿈꾸던 때의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즐기지만 나태하지 않고 편안하지만 위태로움을 잊어버리지 않는 의리가 아니겠는가? 이 모임이 오래가는 것은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그러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습니다’고 하였다. 드디어 이 말을 기록하여 동덕회축의 서문으로 한다.”

▲정조를 구원한 서명선의 초상
1777년(정조 1)에 정조가 작성한 동덕회축(同德會軸)의 서문이다. 이 해 12월 3일에 정조는 ‘동덕회’란 모임을 조직했는데, 영조 말년에 위기에 빠진 자신을 보호했던 서명선, 홍국영, 정민시, 이진형을 회원으로 하는 모임이었다.

동덕회 탄생의 계기는 2년 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75년 11월에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영조는 81세의 병약한 노인이었다. 그런데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세손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고 발언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국왕에게 맞서는 발언이었지만 아무도 권력의 실세였던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이 때 정조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정조를 구원하려고 맨 처음 나선 인물은 서명선이었다. 12월 3일에 서명선은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고, 논란이 일어나자 홍국영, 정민시, 이진형이 서명선을 거들고 나섰다. 오랜 논란 끝에 영조는 홍인한을 처벌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으며, 이듬해 영조가 사망하자 세손은 국왕이 되었다.

1777년부터 정조는 매년 이들을 궁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다. 모임 날짜는 서명선이 상소를 올렸던 12월 3일로 정했다. 모임이 시작되면 정조는 먼저 영조의 은혜에 감사했다. 영조가 서명선의 상소를 통해 홍인한 일당의 음모를 알아내고 정조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조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함께 술잔을 나누고 시를 지었다. 동덕회축이란 동덕회의 첫 번째 모임에서 지어진 시를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다. 서문에서 정조는 어려운 때를 잊지 말자고 했는데, 자신이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개혁 정치를 전개하는데 협력해 달라는 당부였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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