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패배자와 승리자
[백색볼펜] 패배자와 승리자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8.10.07 13:48
  • 호수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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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화재 사건에 더 이상 흥분하지 않고 또 사건 기사에 너무 타성이 붙어서 살인을 인간 비극이 아닌 단순 범죄로만 치부한다면, 그 기자는 결코 우리 신문에 사건 기사를 쓸 수 없다. 우리는 유식한 머리에 무딘 펜보다는 신선하게 빛나는 눈을 원한다.” -링건 스티븐스-

◇ ‘백색볼펜’을 쓰는 시간은 대부분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다. 새벽에 글을 쓰다보니, 나중에 신문이 나오고 나면 ‘글 참, 심하게 감정적이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썼던 일기를 뒤적거리며 그곳에 적어 두었던 인상깊은 말들을 발견하고, 그때의 감정을 반추하며 백색볼펜을 쓸 때가 많다. 지금도 일기를 뒤적거렸고, 2년 전 인상깊게 봤던 문구를 발견했고, 이런 ‘인상깊은 말’과는 전혀 다른 (학생)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억울하다’며 편지를 보내 온 한 제보자의 글을 읽고 ‘세상에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로 편지를 다 보낼까’라는 생각을 했던 지난 주였다. 좋은 기사를 찾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펑크’를 막기 위해 잔머리를 굴렸던 지난 몇 주였다. 처음 시작은 ‘빛나는 눈’이었으나, 현실과 마주한 지 몇 달 안된 지금은 ‘무능한 머리에 무딘 펜’이다. 처음 가졌던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현실(Hard Fact) 앞에서 ‘원래 세상은 다 그런 거야’라며 쉽게 적응하는 패배자다.

◇ 패배자라는 단어를 쉽게 접하는 요즘이다. 그런데, 과연 승리자라는 것이 현실 앞에서 초심을 잃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 승리자와 패배자의 구분을 그렇게 나눈다면, 과연 세상엔 승리한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드라마 작가 노희경 씨는 “인생이란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것과 같다”는 말로 이런 우문에 대한 현답을 끌어낸다.

◇ 목욕탕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때를 밀고 나와도,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쌓이는 게 때다. 목욕탕을 나오는 순간 만나는 현실 앞에서 초심을 잃고 때가 끼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일주일 후 ‘초심’을 얻기 위해 다시 목욕탕에 간다.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번 산 정상으로 돌을 운반하는 시지프처럼,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승리자와 패배자를 나누는 기준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끝나봐야 아는 거죠.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이긴 건지 진 건지는 모르는 거죠”라며 내게 의미를 부여해줬던 후배에게 ‘승리자’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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