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⑤검암기적비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⑤검암기적비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0.07 23:52
  • 호수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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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행적 추앙하며 직접 비문 지어, 1781년 명릉 참배 후 비석 세우고 자신의 효를 표했다

“신축년(1721)에 우리 황조고(영조)께서는 잠저(국왕이 되기 전에 사는 집)에 계셨다. 8월 15일은 숙종의 탄신일이라 명릉을 배알하고, 고령의 농가에서 5일간 머물렀다. 장차 궁궐로 가서 살려고 말 한 필에 동자 두 사람을 데리고 저물녘에 출발하여 덕수천에 이르렀는데, 밤은 깊어지고 불빛이 없어 검암의 발참(파발마가 있는 역참)에서 쉬었다.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앞 시내를 지나갔고, 그를 뒤쫓던 자가 뒤에서 도둑이라고 말했다.
황조고께서 이를 보시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참장(站將)에게 말씀하시길 ‘저것은 흉년이 들어 춥고 배고픔에 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사꾼은 소가 없으면 밭을 어떻게 갈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지만 직책은 직책이니 네가 해결하도록 해라.’고 했다. 참장은 물러나 소는 그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관가에 알려 벌을 주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동이 틀 무렵 말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학가(태자가 타는 수레)가 궁궐 문 밖에서 의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건저(建儲, 국왕의 후계자)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참장이 작성한 벽기(壁記)에 있는데, 참장은 이성신(李聖臣)으로 연안인이다. (중략)
신축년은 하늘에서 우리 집안에 많은 복을 내리신 해다. 황조고께서 숙종의 회갑인 되는 그 해 그 달에 저위(儲位)에 올랐고 신성한 후손들이 계승하여 만세토록 태평할 기반을 세웠다. 그랬던 해가 올해 다시 돌아왔으니, 소자(정조)는 중추절이 되면 명릉을 배알하고 검암에 들러 옛 자취를 차례로 둘러볼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작은 정성을 드러내는 것이요, 조상을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시 은평구의 검암기적비
1781년(정조 5) 8월에 정조가 작성한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의 내용이다. 검암기적비란 영조가 검암에서 보인 행적을 기록한 비라는 뜻이다. 영조의 행적은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21년 8월 15일에 영조는 숙종의 명릉(明陵)을 참배했다. 부친인 숙종의 탄신일을 기념한 방문이었는데 명릉은 현재 고양시 서오릉 안에 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밤이 깊어졌고 영조는 검암의 역참에서 휴식을 취했다. 검암은 당시 고양군 검암리에 있었는데, 현재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에 해당한다.

검암의 역참 앞에는 덕수천이란 시내가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쪽에서 소를 끌고 지나가더니 얼마 후 다른 사람이 그를 쫓으면서 소도둑이라 했다. 이를 본 영조는 역참의 관리인 이성신에게 저 사람이 소를 훔친 것은 굶주림에 시달린 때문이므로 이를 원만히 해결해 주라고 부탁했다. 이성신은 훔친 소를 원 주인에게 돌려보냈고 소도둑은 관가에 고발하지 않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날이 밝자 영조는 서울로 돌아왔고, 그 길로 왕세제에 책봉되어 국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정조는 이를 영조가 국왕의 자질을 갖췄음을 보여주는 행적으로 해석한다. 천지의 가장 큰 덕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영조의 발언으로 소주인과 소도둑이 모두 살아났으니 만물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덕을 갖췄다는 말이다. 정조는 영조가 국왕으로 있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길 조짐이 이미 이때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정조는 그로부터 꼭 60년이 지난 1781년 8월 15일에 명릉을 참배하고 검암에 들러 영조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정조는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영조의 행적을 따라하는 것으로 자신의 효를 표현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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