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 우리대학 석좌교수 고은시인과 예술대학 김수복 시인의 만남
[일파만파] 우리대학 석좌교수 고은시인과 예술대학 김수복 시인의 만남
  • 박준범, 김은희 기자
  • 승인 2008.10.14 04:19
  • 호수 12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5일 예술의 전당 인근 찻집 ‘고종의 아침’에서 만난 고은 시인과 김수복 시인은 시종일관 서로에게 존칭을 사용하며 대담을 나눴다. 50년 전 처음 시인 생활을 시작하던 추억과 7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를 나누던 고은 시인은, ‘통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의 ‘본능’을 강하게 믿는다며 두 시간 넘게 진심을 쏟아낸 두 시인의 대담을 단대신문이 담는다. <편집자주>

■ 일시 : 10월 5일 오후 2시
■ 장소 : 예술의 전당 인근 ‘고종의 아침’
■ 대담 : 김수복 시인
■ 진행 : 권항주 미디어총괄팀장
■ 기록·정리 : 박준범 기자
■ 기록·사진 : 김은희 기자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시인 고은
“역사에 대한 비관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죽은 뒤 다음 사람이 이어 갈 수 있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죠”

‘술 맛 나는 이야기들’을 본능으로 풀어내다
“귀뚜라미가 우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래한 것이 바로 나의 시”

김수복 시인(이하 김) 바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10월 1일부터 우리대학 석좌교수로 단국인이 되신 점 축하드립니다. 대학 구성원들 역시 시력(詩歷) 50년의 한국 대표 시인이신 고은 시인께서 우리대학 석좌교수로 오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단국대학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시게 된 교수님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고은 시인(이하 고) 처음으로 말하고 싶은 “영광스럽습니다”라는 한마디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영광스러운 만큼 어떻게 영광에 보답해야 할지, 그게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네요. 이 대학은 특히 설립자께서 백범의 뜻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분이셨기 때문에, 한국 현대사 100년 안에 담겨있는 민족사회의 고민이나 꿈을 내재하고 있는 학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학교에 뒤늦게나마 구성원으로 함께 동참하게 돼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도 되고 애기(학생)들 만나는 기쁨도 생각하면 신명도 나고 그렇습니다.

먼저 50년이라는 나의 시 세월에 대해 짚고 고백할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50년이라는 시적세월을 나 혼자만 살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사적인 지난 50년을 말하기엔 매우 쑥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공이 사를 압도한다든지 사가 반드시 공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든지 이렇게 주장하는 오랜 관행들을 나는 거부합니다. 공과 사는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내 정직한 신념입니다.

한국 현대시 50년에 내 50년을 더하면 100년입니다. ‘100년을 공이고 내 50년을 사다’라고 하는 것보다 내 50년이라는 것도 공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공을 통해서만이 가치가 발현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내 50년이 그 공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100년을 살리는 생명의 활력 또는 (함께)진행하는 힘, 이런 것이 작용해야 공도 더 살아있는 공이 되지요. 그렇다면 내 50년도 100년에 대해 의미가 있겠다고 여겨지죠. 실제로 내 시의 기간이 50년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도식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백범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단국대학의 구성원이 되어 영광스럽고 두근거립니다. 학생들 만날 생각하면 신명도 나지요.”

내가 있을 때(초기 활동할 때)는 근대시 제1세대라 할 수 있는 육사님이 살아계셨거든요. 그리고 또 실제로 그분의 은거지였던 우이동 집에 가서 차도 마시고, 또 석학 박한영 학승과 같은 분들과 했던 이야기도 듣고 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충분히 같은 대기 속에서 그의 숨결과 내 숨결이 섞여있었으니까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50년과 100년을 정확하게 도식화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춘원 이광수, 정지용, 공초 오상순, 황석우 같은 분들과 같이 어울려서 술도 먹고 싸움하는 것도 보고 뭐 이러면서 다 함께 살아왔으니까, 100년이 나의 이전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기도 했던 거죠.

이렇게 살아오면서 50년이 되니까 현대시 절반이 내 몫이구나 회고를 했죠. 50년이라는 게 51년이나 49년과 다를 바 없으나 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수치의 이름이거든요. 자신의 자취를 성찰하고 한국 시 전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고 이런 지점에 내가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이제부터 다시 새로운 시인으로 신인이 돼서 이 길을 가볼까 그러던 차에 이 대학에서의 생활을 함께 하게 된 겁니다.

(김) 최근 시력 50년을 기념하는 ‘동사(動詞)를 그리다’라는 그림전을 열었는데,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습니까? 그리고 선생님의 시와 그림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고) ‘동사를 그리다’의 특별한 의미라…. 원래 나는 어린 시절 화가를 꿈꿨죠. 외삼촌이 그 당시 이태리에 있었는데 외가에 가면 외삼촌 서가에 책이 있어 멋모르고 꺼내봤는데 반 고흐 책이었어요. 그게 나한테 잘못 만난 거죠. 너무 일찍, 어린 나이에. 그걸 보고 사로잡힌 거죠. 집에 돌아와 그때 '곱흐(고흐) 아니면 나는 무(無)다' 이렇게 딱 써놓고, 화가를 꿈꾸기도 했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바로 미술부에 입학 해 전쟁 날 때(3학년)까지는 미술부에 있었습니다. 교내전 1등 상도 타고, 그 길로 갔으면 지금도 아마 그림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쟁이 나니까 다 무너지고 사는 것과 죽는 것만 남았어요. 뭐 그렇게 지내다 보니 폐허에서 어느날 시인이 돼있었습니다.

꼭 회화를 대신해서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과 완전 다른 관계는 아닌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전쟁이 끝나고 바로 그 당시의 장소가 남아있었다면 계속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전쟁이라는 것이 전부 폐허로 만들어 놓으니까 어느덧 시인이 돼있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미술은) ‘하고 싶은 맘, 지망을 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만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이번에 시인생활 50년 되고, 그래서 저어 밑에 두고 있던 그것을 꺼내 해본 거죠. 지난 여름에 처음 그려봤어요. 그걸 그대로 이번에 냈더니 친구들이 격려도 해주고, 구경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김) 제가 우연히 인터뷰 기사 난 것을 보니 피카소처럼 상의를 벗어 던지고 작업을 하시고 계시던데…

(고) 이번 여름에 폭염 경보도 나고 그랬었잖아? 아내도 외국에 가있고 해서 아는 친구 작업실 가서 작업했죠. 우리 집은 그런 거 할 만한 공간이 없으니까. 조각가가 사주는 삼겹살이랑 소주 먹으며 그렸죠.

 

(김) ‘먹고 사는 거 외에는 폐허적 상황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고) 그게 그러니까 나한테는 생사의 문제였죠.

 

(김) 네, 그래서 ‘폐허에서 어느덧 시인이 돼있었다’고 말씀하시며 시인으로 성취를 이루셨는데요, 어느덧 등단 5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는데, 당시 문단의 풍경이랄까, 등단 당시의 문단 상황 이야기를 부탁 올립니다.

(고) 그 때는 시인의 숫자가 100명 정도밖에 안 될 때야. 어떤 시인의 겨드랑이에 털이 났는지 안 났는지까지 알 정도로 다들 알고 지낼 때였지. 지금은 시인의 숫자가 어떤 사람은 3만 명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5천 명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숫자가 많다 보니 시라는 같은 장르를 쓰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낼 때가 있는 거야. 하지만 그때는 시인들끼리 정이 많았어. 시는 농업사회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건데, 지금은 좀 그런 거 같지가 않아. 예전엔 가난하지만 술 한 잔 밥 한 그릇 심지어는 공기조차도 함께 나누면서 살았는데 지금은 시인 집단이 크게 형성되면서 각자의 삶의 공간이라는 것을 간직하고 좀처럼 서로의 문이 열리지 않아. 이걸 개탄할 이유는 없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차이를 느끼는 거지.

“시는 농업사회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건데 요즘은 골짜기에서 서로의 문을 좀처럼 열지 않는 것 같아. 지상의 폐허와 내 마음속의 폐허가 시의 행간에 스며들어 ‘허무’를 만들어”

(김) 그때 제가 <한국문학사>를 통해 등단했을 때 선생님 자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문구 선생님, 이형도 시조시인 이런 분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던 생각이 나네요. 유신시절 생맥주집이었죠. 12시 넘으면 문 딱 닫고 저는 말석에 끼어있던 시절 말이죠.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그 당시 문단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요 전후의 선생님 시들은 폐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평이 있는데요. 저는 그런 가운데서도 작품 속에 낭만적 열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폐허를 초월하거나 이겨내는 낭만적 열정이셨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거든요.

(고) 내 시의 기반을 폐허와 허무라는 것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사실 문학에서 허무라는 개념은 아주 매혹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유산을 승계하는 행위가 아니라, 유산이 하나도 없는 즉, 무에서 자그마한 유를 실재화 하는 행위거든요. 그래서 모든 시인에게는 자발적인 폐허를 거의 의무처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과 상관없이 내가 만약 어떤 허무에 닿아 있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동아시아의 노장사상도 있고, 무위사상도 있고, 또 불교의 선도 있고, 그 이전에 인도 철학에서의 무 사상도 있고…. 그런 것이 끈이 닿아서 지금의 내게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서구의 19세기 말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것들을 체화한 것이 나의 허무일지도 모른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얘기하면, 그 당시 내가 쓴 시들은 그런 것들을 내가 전혀 모르고 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할 지 몰라도, 정확하게 서술할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어쨌든 나는 내가 지상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 전란에서 소멸되지 않고 일어섰을 때 바로 그 장소가 폐허였다는 거죠.

눈에 보이는 폐허 말고도, 폐허가 만들어진 원인이 또 이데올로기 아니었습니까. 여기서 이걸 때려죽이고, 또 저기서 쏘아 죽이고… 하면서 인간의 정신 자체가 폐허였던 거죠. 그러니까 지상의 폐허와 내 마음속에 투영돼 있는 폐허들이 자연스럽게 시의 행간에 스며들고 물들기도 하면서 나온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보면 ‘허무’의 평이 맞기야 하겠지만, 내가 어떤 리얼리스트로서 그런 것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 1970년대 민주화 투쟁기는 선생님의 삶과 시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요.

(고) 그런 거 얘기하기 위해서는, 이제 60년대 이야기가 나와야지. 통금이 있었던 60년대였어. 그래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술집으로 들어갔지. 돈이 없으면 주모가 쫓아내기도 하지만, 단골이라 묵인해주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야. 그 당시 술집 탁자는 이렇게 우아하지도 않았어. 그냥 대충 맞춘 삐그덕 소리 나는 그런 탁자. 근데 우리는 그런 술집 탁자 위에서 대충 잠을 자기도 했고.

한 번은 그렇게 잠을 자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지.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바닥에 널려 있는 신문을 보게 됐는데, 노동자의 죽음이라는 기사가 있는 거야. 전태일이…. 한 나흘 전 신문이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본 거지. 난 그때 늘 죽음만 생각할 때였거든. 그러니까 내 자신과 견주어지지. 그러면서 이 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현실’이 나오는 거야. 청계천 노동자의 참상. 그러다보니 점점 그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거지.

난 정치 옆에 다가가기도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기울게 되더라고. 그런데 나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대학생, 대학교수들 이런 사람들이 전부 정말 이런 ‘충격’들을 통해서 영향을 받고 노선을 바꾸던 시절이었어. 나도 그런 부류들 중의 하나였던 거고. 이제껏 몸에 닿지 않았던 이런 현실들을 직면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급속도로 아무 준비도 없이 머리는 텅 비어있는데 몸만 나서기 시작한거야. 의식은 나중에 따라왔어. 그러다가 70년대 중반 쯤 되니까 내 몸과 의식이 일치되더라고. 그래서 70년대 중반부터 내 시도 세상에서 말 하는 ‘참여시’라는 게 나오게 된 거 같아. 시가 내 삶을 따라온 거지. 청진동, 그러니까 우리의 ‘광장’에서 있었던 일이야.

 

(김) 선생님은 70년대 후반부터 고초를 겪으셨는데…

(고) 나는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77년부터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가기 시작해서 79년 YH사건에 연루돼 국보법 위반으로 투옥됐지. 부마사태 번지고, 박정희 죽고…. 얼마 안 있어서 난 보석으로 나왔지, 80년대 초 서울의 봄일 때. 그때 나오니까 내 이름 석자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내가 움직이는 모든 동선이 파악돼서 중계감시를 당했거든. 결혼식장 가면, 목욕탕 가면, 술집 가면… 다 따라오는 거야. 자기들끼리 릴레이로 중계를 하며, 중계감시 하는 사람들 불쌍해서 그냥 같이 술이나 마시자는 말도 하고…. 그 정도였지. 중계감시, 서울의 봄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겐 서울의 혹한이었어.

그러다가 내가 문학 분야뿐만 아니라 재야에서 부위원장 이런 거 하면서 대표성을 갖게 되니까, 그리고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이런 사람들이랑 엮이다 보니까 또 나중에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와서 내란 음모라는 걸로 집어넣더라고. 거의 죽는다는 생각으로 들어갔지.

육군교도소에는 창이 없어요. 밀실이야 밀실. 미로처럼 돼 있어서 어디서 누가 잡혀왔는지 죽는지도 모르는 독특한 구조의 특별 감방이었지. 근데 또 하필 내가 있던 방이 김재규 씨가 있었던 방이야. 육군 소장이 시찰 왔다가 “허, 참. 이 방은 정말 무서운 방이군”이러고 가더라고. 나는 처음에 내가 있어서 무서운 방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처형당하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방이라는 의미였던 거지.

그때는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요. 소변통 하나 있지. 마치 입관된 기분이 드는 거야. 실제로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은 적이 있는데, 꼭 세워 놓은 관 같은 공간에서 조사를 받거든. 앉지도 못 하고 서 있어야 하는 구조인거야. 거기서 이틀 동안 서 있다고 생각해봐. 지독해. 숨 막히죠. 밑으로 밥을 넣어주면 서서 밥을 먹고…. 거의 그거랑 비슷한 숨 막히는 구조가 내가 있던 방이었어. 근데 그것도 적응이 돼는 거야.

거기서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드니까 뉘우쳐지는 게 그렇게 많더라고. 좀 더 멋지게 살 걸. ‘이런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반대 생각으로, ‘만약 내가 살아난다면 뭘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 나온 게 『만인보』, 『백두산』 이런 거야. ‘살 수 있으면 이런 걸 하고 싶다’ 이런 것들, 그러니까 내가 시간을 구원 받는다면 꼭 하고 싶은 것들. 그러다가 나중에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차에서 몰래 밖을 보는데, 정말 살아있음을 느꼈어. 그때 받은 생각이, ‘외부(세계)가 나를 살게 하는구나. 내부만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외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구나’ 이런 거였어.

“의식은 나중에 따라왔어. 청진동, 우리의 ‘광장’에서. 입관(入棺)된 기분의 감옥 안에서 외부(세계)가 나를 살게 함을 깨달았지. 그때 쓴 시가 『만인보』야.”

(김) 선생님께서 그런 밀실과 같은 교도소의 체험이 ‘외부와의 소통을 통한 삶’의 인식이 굳어지고 또 그러면서 『만인보』를 구상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시집 『만인보』에 등장한 인물들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시로 쓴 인물사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셨던 '수많은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분들이 시에 등장했을 텐데요, 이 『만인보』에 담겨 있는 분들은 선생님께 어떤 사람들인가요.

(고) 『만인보』의 인물은 나에게 분에 넘칠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인보』에 나와 있는 인물들은 내가 어린 시절에 나와의 피붙이도 있고, 외할머니도 있고…. 이런 사람들도 그리지만, 내가 떠돌았던 장소마다 만났던 사람들을 가능하면 낱낱이 재현시키고 싶었습니다. 또 내가 살지 않은 역사속의 인물들 중 흔히 아는 유명한 인물들을 제외한 역사 속에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을 임의로 그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 하인의 딸과 같은 사람들을 그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때는 약간의 허구가 들어가기도 하죠. 즉, 『만인보』의 인물들은 내가 고금을 다니면서 한반도를 다니면서 그린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렸던 거죠. 이제 거의 마무리가 돼 가고 있습니다.

 

(김) 『만인보』 21, 22권에 우리대학 설립자인 범정 장형 선생님과 명예총장이신 중재 장충식 전 이사장님에 대한 시 ‘장충식’과 ‘장형’이 수록돼 있는데요, 두 분에 관한 특별한 인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형 선생님과 장충식 명예총장님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고) 나는 현재 백범기념사업회 고문입니다. 백범의 어머니 동상 세울 때도 내가 추모시를 읽었고 또 오랫동안 백범의 노선을 아주 숭앙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승만 대통령과 반대 된다던지 박헌영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과 노선 차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백범은 민족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분이 갖는 소박한 정치이상 이런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는 아주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백범은 특히 부국강병 주의가 아니라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분입니다. 미국에서 박사도 안 하셨고 유럽에서 공부도 안 하신 분인데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서 살다가 터득한 지혜들이에요. 이런 사람의 입에서 ‘내가 바라는 최고의 나라는 한없이 높은 문화를 누리는 나라다’라는 말씀이 나온 거죠. 세상에 이런 언어를 쓰는 정치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분과 함께 건국시대를 동행한 사람이 장형 선생입니다. 백범이 망명정부 끝내고 돌아오면서 했던 생각이 전국의 모든 국민을 교육시켜야겠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 뜻을 받아 대학을 세운 분이 장형 선생입니다. 당연히 이 분을 노래해야 하는 의무가 내게는 있는 거죠.

장충식 명예총장님의 시를 얘기 하자면, 아 정말 술 맛 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이 분이 참 멋쟁이인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유학 생활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선친을 신성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장 명예총장님은 선친 살아 생전에 있었던 행적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아, 왜 사람이 한 평생 살다 보면 사람들이랑 엮이면서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잘못들 있잖아. 그런 일들을 전부 찾아서 대신 사죄하고 물어줄 것 물어주고 이랬던 거지. 나는 이건 듣도 보도 못한 특별한 경우입니다. 정말 반할 만하죠. 아, 이거 술 맛 나는 이야기죠.

“단국대학교의 통일비전을 들으니『만인보』의 「장형」과 「장충식」시작(詩作)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옵니다.”

(김) 최근에 간행된 시집 『허공』에 인상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허공에 쓴다’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의미로 읽을 수 있는지, 단순한 초월의지나 달관의 자세라고 하기엔 시와 현실에 대한 열정이 아주 강하신데요.

(고) 김수복 학장님께서 다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거 다 해당될 수도 있고 해당되기에는 너무 엄청나서 아닐 수도 있고 그러네요. 허공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빈 상태이고, 누구에게나 빈 상태를 가득 채워야 할 공간이며 공간의 초월이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양의성이 있죠. 허공에 쓴다는 것. 굳이 이야기하자면 김 학장님께서 말씀하셨듯, 초월의지나 열정 등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되기를 나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김) 한 가지를 포함 한다기보다는 전체적인 그런 것을 의미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공이라는 큰 화두를 가지고, 요새 너무 작은 소재주의나 일상성에 매몰돼 있는 시단에 그런 ‘소소함’을 극복하자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 바로 그런 이야긴데, 다들 자기만의 골짜기에 거미줄 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아. 물론 내 시가 그런 거미줄을 벗겨내 버리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김) 선생님의 모든 시에는 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고) 최고의 격려를 해주시네. 올해 내가 칭찬 들은 게 하나 있는데 독일에서 봄 행사가있었거든, 베를린에서. 큰 국제 행사가. 한 20명이 모여 있는데도 각각 행사가 있으니까 친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지막 날에는 다 모여 쫑파티를 하는데, 그때 인도 시인이 나한테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당신은 시인이 아니라 바로 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날 그 칭찬 듣고 돌아와서 오늘 혼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한테는 두 번째 칭찬이야. 국외에서 듣고 국내에 와서 또 한 번 듣고.(웃음)

 

(김) 몇 년 전 결성된 남북한 작가들의 모임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요. 현재 어려운 남북관계를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 2006년이었던가 2005년이었던가 그랬죠. 내 잊어버렸네, 벌써. 그때 최초로 남과 북의 작가들이 모여서 백두산에 올라가서 같이 시도 읽고, 어떤 새로운 문학 선언도 하고 감격적인 축제를 가지고 했는데요, 올라가니까 그날 마침 해가 저 동쪽에서 떠올라. 그러면서 달이 서산에서 걸쳐 있는거야. 일월이 함께하는 순간. 그때 우리가 거기 있었어. 그러니까 얼마나 자연과 함께 고조돼 행복을 서로 나눴는지….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80년대 중반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바로 문학 강연을 통해 남북 작가들이 만나야겠다고 최초로 제안했어요. 제안만으로 호된 시련을 받았어요. 아주 호된 시련. 그래도 주장하고. 나중에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회장도 맡지 않았습니까. 판문점 가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도 가고 그런 과정이 하나하나 쌓여 20세기 새로운 시기가 되면서 이렇게까지 성사가 된 겁니다. 물론 2000년 그때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죠. 그 당시에 우연치 않게 시를 읽게 돼서 남북 전 국토에 중계가 되기도 했고. 그때 민족문학인협회도 만들고 남북이 함께 잡지도 한 번 만들어 보고 그랬지만 이건 하나의 시작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이 길이 아주 잘 뻗은 고속도로만 있어서 달리기만 하면 갈 수 있는 행복한 길이 아니라, 지극히 고비가 많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길이 지금 고비에 부딪혔어요. 근데 이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이 정부도 끝내는 남북의 소통 없이 남이나 북이나 존속할 수가 없게 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남북이 만나는 건 민족 국내 문제로만 아니라 민족의 국제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만나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것 생각하면 정부의 한계가 다음 단계에 가서 변할 것입니다.

지금 안 된다고 절망하거나 화내거나 울거나 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아주 이럴 때일수록 그 동안 쌓아온 것을 반추하고 앞으로 나갈 전망을 세워 더 확실한 자기 보폭을 마련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는 역사에 대한 비관은 전혀 없습니다. 설사 탁 막히더라도 내가 죽은 뒤 다음 사람이 이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로써 역사가 끝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김) 6·15남북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의 한 사람으로서 통일에 대한 생각도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다음으로 통일과 우리대학과 관련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대학 역시 통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닌 대학입니다. 장충식 명예총장님은 지난 9월 단대신문과 인터뷰에서 "단국대학을 통일을 준비하는 대학으로 만들고 싶다"며 "앞으로 '통일의 대통령'은 단국대학에서 나와야 하고, '통일의 일'을 만들어 가는 사람도 단국대학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밝히신 바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대학의 석좌교수를 맡으신 고은 시인님의 통일 관련 '대학 활동 계획'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또한 단국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남북의 길은 잘 뻗은 고속도로가 아닌 고빗길입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도 남북소통의 길로 갈 것입니다. 지금은 그 때를 준비해야죠.”

(고) (박수치며) 흥분이 되네. 아… 흥분 돼. 나의 경우에는 말이죠, 통일지향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60년대였었습니다. 고도의 의식화된 과정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러했던 거죠. 시적 본능, 거의 동물적이에요. 마치 귀뚜라미가 우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됐어요. 이제부터 울어야겠다가 아니라, 그냥 해야겠다. 그래서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것들에 의식이 따라왔지요, 나중에.

그래서 나는 본능을 의식보다 밑에 두지 않습니다. 본능이야말로 위대합니다. 본능이 나를 만들어 준 거죠.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면 운명이 어떻게 만들어 줬다 해야겠으나. 분단 구조라는 곳에서 사는 ‘동물’의 하나로서 본능적으로 분단을 타파해야겠다, 이렇게 된 거에요. 내가 무슨 고도의 정신이나 의식이 발달해서 남보다 더 민족문제에 대해 천착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 숨 쉬니까 분단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에요. 매우 생물학적인 현상이야, 이거는. 거기에 나중에 의식이 따라붙고 지금의 이론도 만들어지고 그랬던 거죠.

2000년 그 때는 아무도 남북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할 때였거든. 나는 15일 동안 갔다 왔습니다. 안내원 말하기를 “이전의 남쪽 사람이 북쪽 조국에 와 이렇게 세세히 낱낱이 돌아다녀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후도 없을 것입니다” 라며 말하는 거야. 너는 특별대우니까 어쩌고 하더라고. 그럴 정도였어요. 나는 두 개 도만 빼고 다 봤어요. 거지 거지 상거지도 다 봤어. (얘기는) 안 했지만 처참한 거 아주 다 봤어요. 그런 것도 나한테 다 보여주더라고, 이상하게. 기차 한 번 탔는데 가다가 서고 가다가 서고 아예 안가. 그래서 내려서 차 부르고… 아주 복잡했어. 오늘 처음 이야기 하는 거야 이런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우리 조국의 절반입니다. 남의 나라가 아니라, 적지가 아니라. 그렇게 갔다가 다음 해에 극적으로 우리 대통령이 가게 된 것 아닙니까. 거기에 나 하나 껴 주더라고. 그 전에 감옥살이 같이 하고 그래서 그런 건지. 그렇게 해서 가게 됐는데, 글쟁이는 특별수행원에 나밖에 없잖아. 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이 글 쓸 줄은 모르잖아. 그래서 신문사 기자들이 나한테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래서 몇 군데 산문을 냈는데, 제일 나중에 조선일보가 써 달래. 나는 “안 해. 딴 데 이미 다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뭐냐”고 그랬더니 산문 말고 시를 써 달래. 전면으로 크게 써 달래. 그래서 하겠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북한 초대소에 갔어. 구렁이 술 무슨 술 무슨 술. 한 40가지가 있어. 북한 최고급 술이야. 거기 있는 술들 중에 구렁이 술은 못 먹겠고 다른 것들 한 잔씩 맛보다가 취해버렸어. 흥분 되서 거기서 조선일보 시를 하나 썼어. (그런데 혹시 몰라서) 그걸 거기에 안 놓고, 누가 나 안보는 사이에 누가 뒤질 수도 있으니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어.

새벽 네 시가 됐는데 강만길 역사학자한테서 전화가 와. 나는 고위부에서 내가 안자는 걸 알고 왜 안 자는지를 추궁하는 전화인 줄 알고 안 받다가 받았더니 강만길인거야. “너 어떻게 전화했니” 하니까, “어떻게 잘 조사해보니까 전화가 되더라”고 하면서 “잠이 안와” 이래. 역사학자니까. 최초로 갔으니까, 역사의 현장에 오니까 잠을 못자고 있는 거야. 그때가 4시 반인데 나가자 했어. 대동강변에 안개가 막 껴있어. 벤치에 앉아서 보니 강만길이는 첫날 밤 신부처럼 들떠 있는 거야. 나는 저번에 한 번 와 봐서 괜찮은데, 강 교수는 처음이잖아. 그래서 내가 “나 시 썼다” 했더니, “그래? 한 번 보여줘 봐”이러더라고. 보여줬더니, “야 좋구나” 이래. “좋냐” 이러고 집어넣고 돌아왔지.

그날 오전에 남북합의서를 하기로 했는데, 서로 문구 가지고 양보를 안 하면서 합의문 작성이 잘 안 됐어. 그래서 그날 김정일하고 만찬에 갈 때까지도 합의문 작성이 안 된 상태였어. 그런데 마침 만찬 하는데 합의문이 완성 돼서 온 거야. 그래서 바로 그 장소가 잔치가 된 거야. 보통 때는 합의문이 다 끝나고 점잖게 만찬을 하는데, 이때는 완전히 잔치 분위기가 됐어. 막 사람들이 흥분해서 술을 따르고… 그때 강만길이 내 시를 생각한거야. 이 자리에서 읽으면 좋겠다고. 조선일보에 줘야 할 건데 말이야. 강 교수가 우리 대통령에게 이야기하니까 “우리야 좋지만 글쎄요” 하니까, 다시 북 측에 요청을 하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술만 먹고 있었거든. 그때 박재규 통일부장관이 “서울의 위대한 시인이 시 낭독을 하겠습니다” 이러면서 나를 쳐다봐. 우쭐해가지고 나가서 읽었지.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니길 잘했어. 그걸 읽었는데 현장이 울음바다가 되가지고….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게 또 남북에 생중계로 나갔더라고.

“6년 안에 우리민족 앞에 『겨레말 큰사전』을 헌납할 계획입니다. 현재 삼분의 일 정도 작업 마쳤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 입니까.”

아, 그 이후로도 난 겨레말큰사전편찬회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건 통일의 기반이기도 하고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고 초석을 만드는 거죠. 모국어의 통합만이 시작이고 궁극적인 끝이고 그런 거니까요. 이 일을 내가 맡게 된 것 자체가 민족이 나에게 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해에는 통일과 같은 일들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정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만장일치 가깝게 지지해줘 편찬회법이 통과됐는데, 그 당시 대북사업 중에서 남쪽에서 한 건 유일하게 법으로 통과된 것이 이거였죠. 우리도 노력했지만 입법 기관에서도 헌신적으로 호응해주셔서 참 감사했고. 현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적입니다. 다만 전체 분위기 때문에 일정을 조정하고 있는 거죠.

내 주장은 말이죠, 지금 상태보다 악화돼 남북이 포화가 오고간다 할지라도 양 측이 모국어에 대해서는 논의하는 모습을 지구상에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저 민족은 위대하다. 서로 원수가 돼, 총질하는 상황에서도 모국어에 대해서는 저렇게 일을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는 사례를 하나 보여 주자라는 것이 내 요즘 절절한 충정이죠.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곧 개성에서 만나기로 돼 있는데, 현재 3분의 1이상 진행돼 있거든요. 앞으로 6년 안에 당당히 민족 앞에 남북이 함께 만든 큰 사전을 헌납할 생각이죠. 그런 점에서 단국대학교가 지향하고 있는 비전이 ‘통일실현을 위한 여건을 만들고 통일 이후의 조국을 위한 여건도 만드는 것’ 이라면, 그런 위대한 비전을 가졌다면 기꺼이 나 같은 사람이라도 바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김) 우리대학의 문화기술연구소라고 부설 연구소가 있는데, 이번에 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지원과제로 우리대학 대표로 통과가 됐습니다. 그 주제가 바로 통일시대를 대비한 남북한 문화예술의 소통과 문학인데요, 북한 문화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와 남북한 공통 문화소 추출 작업을 통해 어떻게 소통하고 융합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입니다. 저희들이 쭉 해오는 연구 작업이 남북 통일시대를 대비한 그런 것인데, 문화예술 소통의 초석을 다지는 연구들, 이런 것들이 선생님의 통일에 대한 생각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 지하 장형 선생께서 환호하시겠습니다.

 (김) 저희들도 겨레말큰사전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고)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