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⑥대로사의 비문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⑥대로사의 비문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0.14 16:35
  • 호수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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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충성심을 부각하기 위해 정조가 친히 글 지어

효종에게 한결같은 충성심을 표현한 송시열처럼
정조에게도 그러한 신하가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 표현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천에 하나 있을까 한 성인으로 어려운 시대를 만나 상처투성이의 백성들을 돌보면서 은밀히 북벌의 계책을 도모했다. 그 때 덕을 함께한 신하로 물과 물고기처럼 뜻이 맞았고, 춘추의 의리를 앞세웠으며, 앞뒤에서 보조를 맞추고 천하에 인륜을 표방한 사람은 바로 선정(先正) 송우암(宋尤菴)이었다. 효종께서 승하하시자 선정은 홀로 남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고, 선침(仙寢, 국왕의 묘소)을 여주로 모실 때 왕릉 주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울면서 못 잊어 하는 마음을 보였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 자리를 가리키며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생각한다고 한다. (중략)
나는 즉위한지 3년인 기해년(1779) 길일에 영릉을 참배하고 여주의 청심루(淸心樓)에 머물렀다. 많은 선비들이 한목소리로 선정의 사당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기에 내가 즐겁게 듣고 허락했다. 7년이 지난 을사년(1785)에 사당이 이루어져 선정의 영령을 모시고 대로사(大老祠)라는 이름을 지었다. 3년이 지난 정미년(1787)은 선정께서 태어난 지 삼주갑(180년)이 되는 해여서 뜰에다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의의를 갖추어 기록한다.
사당은 여주의 읍치에서 수백 보 떨어진 청심루의 서쪽에 있고, 영릉에서는 2리 정도 떨어져 있다. 그 뒤를 받치는 학록(鶴麓)은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이고, 앞을 둘러싼 여강은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

▲전면에서 본 대로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4호).
정조가 1787년(정조 11)에 지은 대로사(大老祠)의 비문이다. ‘대로’란 ‘위대한 원로’란 뜻으로 조선후기의 대학자였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가리킨다. 1779년(정조 3)에 정조는 7박 8일의 일정으로 여주를 방문했는데, 여주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친 정조는 청심루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이날 여주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청심루에 송시열의 사당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효종과 송시열의 각별한 인연은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시작되었다.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배하자 청나라는 세자를 인질로 내어줄 것을 요구했고, 소현세자가 바로 인질의 몸이 되었다. 이 때 세자의 동생이던 봉림대군(효종)도 함께 잡혀갔는데, 그는 청의 인질 생활을 하면서 청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국왕이 된 효종은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청을 공격하겠다는 북벌론을 추진했고, 송시열이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해졌다. 그러나 효종의 사망과 함께 북벌론은 중단되었고, 송시열은 영릉 인근에 있던 청심루에 머물면서 효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송시열의 사당은 이미 여러 곳에 있었는데, 대부분은 노론의 영수이던 송시열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었다. 그런데도 정조가 여주에 송시열의 사당을 세우게 한 것은 그의 학문보다는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북벌론을 추진할 때 전면에 나서서 실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효종이 사망하자 국왕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충성심을 표현했다.

정조가 대로사를 건설하게 한 장소는 송시열이 효종을 그리는 시를 지었던 청심루 옆이었고, 대로사의 비문을 지은 시기는 송시열이 태어난 지 180주년이 되는 1787년이었다. 정조가 송시열을 위한 비문을 짓고 그 글씨까지 쓴 것은 효종에게 충성했던 송시열처럼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나오기를 기대한 때문이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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