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미 동문
서유미 동문
  • 김유진 기자
  • 승인 2008.11.05 21:04
  • 호수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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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국문·98졸) 동문

여름이 시작 될 무렵, 여행지에 챙겨갈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그때 나는 여러 날 고민하다가 ‘시간’ 에 대한 단편이 실려 있는 책을 추천했다. 여행과 휴가라는 쉼 속에서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동문 칼럼」이라는 지면을 통해서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마감 날짜를 확인하고 좀 놀랐다. 올해의 달력이 겨우 두 장 반 밖에 남지 않아서다. 남은 달력보다 뜯어낸 달력이 많다는 건, 갖고 있는 돈은 얼마 없는데 써야할 데가 많은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른 방향으로 시간에 대해 고민해볼까 한다.

날이 쌀쌀해지고 해가 짧아지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스산함의 밑바닥에는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생각, 이제 곧 한 살 더 많아질 텐데 해놓은 게 별로 없다는 자책감이 깔려있다. 설렁설렁하게 살아온 사람은 물론이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사람도 이런 근원적인 후회와 맞닥뜨리게 된다. 일 년 동안 뭘 하며 살았나, 다이어리를 훌훌 넘기다보면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은 억울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그래서 달력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급해진다. 열 달 동안의 게으름을 두어 달 만에 만회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발동한다.

머릿속에서 초침소리가 재깍재깍 울리기 시작한다. 새해에 결심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얼마나 이루었나, 점검의 시간을 갖고, 절반도 이루지 못했으며 심지어 어떤 일은 계획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산 것에 대해 자아비판의 시간을 갖고,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겠다며 마음을 재정비한다. 자책감을 누르고 설핏 의욕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조급함과 의욕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람의 마음속에는 해야 할 무언가를 슬쩍 뒤로 미뤄두고 싶은 게으름도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올해는 거의 다 지나갔으니 내년부터 제대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 얼핏 보면 새로운 결심 같지만 사실 그 속에는 남은 시간, 실패한 것 같은 올해를 포기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녹아있다. 그러니까 오늘까지는 놀고 내일부터 공부해야지. 다음 달부터 운동해야지, 이런 사소한 미룸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필자는 지금까지 꽤 많은 날들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시간에게 질질 끌려가는 삶. 계획한 것은 많지만 마음만 바쁘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인생. 이런 삶은 성공하지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고 ‘나중의 언젠가’ 같은 막연한 시간 속에서 헤매기 때문에 불행하다. 얼마 남지 않은 달력을 보고 놀라는 바로 이 순간, 읽어야 할 책을 펴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면 좀 더 뿌듯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되는 것은 물론, 인생의 그림도 달라질 것이다.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나 시간에 대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일과 휴식의 시간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는 없을까. 사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하는 고민일 것이다. 정답도 없고 왕도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나는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인가, 라고 자문해보겠다.

서유미(국문·98졸)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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