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⑨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⑨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1.17 13:07
  • 호수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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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 제독의 사당에 관한 기록
멸망한 명나라의 제독 이여송을 기린 정조대왕의 「제독이공사당기」

“이여송(李如松) 공은 본래 조선인인데, 그의 5대조가 명나라에 귀화하여 영원훈위(寧遠勳衛)를 세습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왜놈들이 창궐하여 우리 강토로 쳐들어와 한 달 만에 팔도의 도로를 메웠다. 명나라 천자께서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공에게 요동, 계구, 보정, 산동 등지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탕하게 했다. 공은 이듬해 정월에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부장 조승훈(祖承訓)은 서남쪽에 잠복하고, 유격 오유충(吳惟忠)은 따로 모란봉을 공격하게 하게 했다.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화기를 쏘며 동남쪽을 빠르게 공격하자, 연기와 불꽃이 공중에 가득하고 고함 소리가 수십 리를 진동시켰다. 왜군의 총알과 화살이 비 오듯 하자 군대가 조금 물러났는데, 공은 맨 먼저 물러난 자의 목을 베어 군중에게 돌리고 장수들을 독려하여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사다리를 놓아 성벽을 오르게 했다. 장수와 병사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데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었고, 한낮이 못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중략)
공이 구원하러 왔을 때 금씨(琴氏)의 딸을 시중드는 사람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 아들이 있었고, 공의 손자인 응인(應仁)은 공의 유언에 따라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번창하여 영원백(寧遠伯, 이여송)의 후손들이 우리나라에서 엄연히 일족을 이루었는데, 가난하고 예법을 몰라 별자(別子)가 타국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공의 후손들에게 명하여 공을 불조주(不?主, 제사를 계속해서 모시는 신주)로 세우고, 자금을 주어 사당을 짓고 대대로 제사를 모시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공을 갚으려 하고 자손들이 선조의 덕을 기리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만둘 수 없는 정 때문이다.

▲ 평양성 전투를 그린 기록화로 서양식 화포인 불랑기가 성문을 공격하고 있다.
정조가 1788년(정조 12)에 작성한 『제독이공사당기(提督李公祠堂記)』라는 글이다. ‘제독 이공’이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 이여송(李如松, 1549∼1598) 제독을 말한다. 이여송의 5대조인 이영(李英)은 원래 조선인이었는데 명나라에 귀화하여 중국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여송은 4만 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했는데, 평양성 전투를 벌여 왜군이 차지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왜군을 계속 추격하여 평안도, 황해도, 개성 일대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서울 수복에 실패하고 개성으로 물러났으며, 이후 일본과의 강화 교섭에 주력하다가 철군하고 말았다. 흥미로운 일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이여송 집안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대거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이여송의 아들인 이성충과 그의 동생인 이여백, 이여매의 자손들이 조선으로 왔는데, 정조는 이여송의 손자인 이응인도 조선으로 귀화했다고 했다.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은 일족을 이루었는데, 경제력이 충분하지 않고 예법을 제대로 지킬 줄 몰라 자신들이 직접 이여송에게 제사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조는 이여송의 후손인 이광우를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경제력을 갖추게 하고, 이여송의 사당을 지을 비용을 제공했으며, 사당 건물이 완성되자 이 글을 지어 주며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정조는 이러한 조치가 조선인으로서는 이여송의 공을 갚으려는 것이고 후손으로서는 조상의 덕을 기리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선은 이여송의 조상이 살던 나라이자 유교식 예법을 제대로 실천하는 나라이므로, 조선이 아니라면 이여송의 혼령이 흠향할 곳도 없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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