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영혼 ⑧ 공간을 사유하는 법
공간의 영혼 ⑧ 공간을 사유하는 법
  • 이원상(도시계획·부동산·05졸) 대한주택공사 주택도
  • 승인 2008.11.25 16:32
  • 호수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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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공간 에서의 시작, 그 영롱한 공간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소중한
우리들의 시작이 담겨있는 공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은 도시 공간을 분석하는 틀을 인문학적 분석처럼 보이는 에세이 수사법과 관상학적 도시공간의 관찰로 삼았다. 그의 일련의 저서들은 공간을 사유하는 방식의 창발적인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인 까닭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피하다가 국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그는 자신의 삶의 공간과 자본주의의 만개처럼 보이는 당시 도시 아케이드의 부티크, 상점의 현대적 오부제-기호들을 꼼꼼하게 메모하며 우리에게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라고 알려진 미완성 19세기 도시공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도시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을 수 없음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도시에서 길을 잃으면 마치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훈련이 필요하다. 거리 이름은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숲의 꺾인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을 걸고, 시내 중심가의 작은 거리들은 산골짜기처럼 명확하게 하루의 시간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나는 최근에야 방황하는 기술을 알았다.”

19세기 파리의 도시경관은 벤야민에겐 미로처럼 보였다. 그곳의 염세적이고 캉캉의 매혹같은 환락의 천민적 도시풍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 좌표이자 정체성을 설명하는 오브제였다. 벤야민의 사유는 바로 유물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필자가 자란 수도권 공업도시의 일번가 풍경은 천박한 네온사인의 거리이자 교복을 제멋대로 줄여 입은 중고생들의 사교장 같은 공간이었다.

기차역 주변의 공구상가 주변에는 고교생들이 어슬렁거리며 동시상영관을 중심으로 자신의 공간반경을 설정하고 있었다. 철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넘어서면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단지의 진입로가 나 있었고 오락실이 즐비한 육교시장이 시작되었다. 그 길의 끝은 산업도로와 맞닿아 있었으며 도로의 저편으로 유년의 공간이 되어 주는 나와 내 친구들의 동네가 단독주택가에서 이제는 점점 다세대주택으로 변한 중층의 판상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 시작과 숙명의 공간.
이 공간과 그 곳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자 시도했던 고교시절의 끝자락, 이 모든 공간을 볼 수 있는 길이란 높은 곳에서 한눈에 그것을 내려다보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고교학창의 마지막 겨울, 내 친구와 나는 라스트씬(Super Hi-8mm 포맷으로 진행시키고 있었던 30분 분량의 단편영화, Bridge)을 찍기 위해서 자정 무렵 눈이 발목까지 차오른 관악산 어느 깊은 중턱을 올라갔다. 한 손에 든 휴대용 후레쉬 라이트가 유일한 방향등이자 조명기기였기 때문에 인물동선과 프레임 안에 든 인물의 표정이 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등산로를 한참 벗어났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곧 길을 잃었다.

작은 시련의 시작. 한참을 어둠속 눈밭에서 방황하다가 깨닫게 되었다. 시나리오의 극중 상황처럼 길을 잃었을 때 점점 더 선명하게 자신의 나약함을 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의 동기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사카고치 안고’의 등장인물들(동경의 유곽)이 가지고 있는 나약하지만 강렬한 삶에의 집착, 이윤학 시인의 ‘저수지’와 같은 실존으로써의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공업도시의 그 스산한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 눈밭의 새벽은 내게 말 그대로 작은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청춘의 영롱한 장소가 되었다. 주황색 가로등불만이 켜진 새벽의 공업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두 소년이 외친 대사처럼 ‘우리는 청소년의 시절을 학교체제에 헌납하며 당할 만큼 당했다.’, ‘하지만 소중했었다.’라고 소리친 라스트 대사처럼 자의식이 만개하는 순간을 그 시작의 공간에서 맛보았다.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와 모스크바를 전전하며 공간을 사적인 것처럼 기술했다면 청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장소에서 우리는 소리치며 카메라를 돌려댔다.

기대감과 설레임, 그리고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이제 곧 스무 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정했던 대로 산 중턱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철로길과 그 주변의 상업지역과 난립한 주택가는 혼돈 그 자체였지만 소중한 삶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중한 까닭은 그곳에 나의 친구들이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잘 것이 없지만 내 학창의 종지부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시련 속에서 시작하는 영롱한 시작의 공간, 우리는 청춘의 자의식이 만개하는 이와 같은 순간과 그 장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출발은 대개 시련이란 이름의 벗과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볼품이 없다. 이를테면 현존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시작의 공간도 초라하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테헤란 소년 ‘아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는 당시 소년들의 취미였던 버려진 영화필름 조각 모으기에 심취해 있다가 필름 조각 속에 비춰진 ‘소피아 로렌’에게 사로잡혔다.

어두운 객석, 이태리 영화, 소녀들, 좁은 통로, 경박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미국인 관광객들로 점철되어 있던 극장 주변의 공간은 소년의 자의식을 배양하는 공간이 되었다. 따이페이의 에드워드 양(楊德昌, 1947-2007)은 대만출신이었고 해외 고급대학을 졸업한 공학도로서 장래가 보장된 대기업 출신이었다. 당시 그는 영화 감독의 꿈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70년대 ‘베르너 헤이조그’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단순함과 직선적인 시선은 에드워드 양에게 삶의 새로운 시련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출발선으로 가게 하는 경종이 되어 주었다.

아직까지 따이페이의 현대 도시공간의 자화상을 비극적으로 그린 작품들이 빛나게 남앙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삶의 공간에서 마주한 새로운 시작의 자의식과 대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찰나(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지나치기 쉬운 지극히 평범한 삶의 공간, 즉 난잡한 거리와 대도시 업무지구의 높다란 파사드 속에서, 인파와 우리 시대의 상품 기호들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지리부도의 좌표를 다시금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볼품없을지언정 하여간 그렇게 청춘은 공간을 사유하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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