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영혼 ⑨ 공간의 정체 1부
공간과 영혼 ⑨ 공간의 정체 1부
  • 이원상(도시계획·부동산·05졸) 대한주택공사 주택도
  • 승인 2008.12.02 16:39
  • 호수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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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강요하는 공간과 펑크한 태도의 출몰

아직도 궁금한 것은 공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공간 위의 힘의 균형을 설정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간 위를 수놓는 힘의 자장이 공간을 이기적이게 하는지 하는 것이다. 장면 하나.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롭지 않나요. 로미오 역시 로미오란 이름을 버리더라도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남을 것이 아녜요?”(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든지 규정할 때 상대는 나에게로 다가올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개인이 차지하는 공간은 생각보다 완강하게 상대방을 밀쳐낸다. 내가 상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의 넓이는 사실상 내 마음의 포옹력에 비례하게 된다. 공간은 형이상학의 좌표 안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공간은 가시적 장소의 울타리를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공간이 이기적인 것은 공간이 점유되는 대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속성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소통하기를 거부할 때 포옹할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된다. 이것은 공간 자체가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히틀러는 세계를 소유하고 싶었지만 제국의 영토는 오히려 연합군의 개선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공간은 힘의 균형과 평상심을 깨려고 하는 일렬의 모든 시도에 반감을 가지는 것 같다.

▲ 눈에 비친 마천루의 도시: 사람의 의지가 공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인지, 공간의 성격이 사람의 행동반경을 결정하는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공간은 점점 문화를 융합하려들려고 하고 이 때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무정부주의 색채이다.(리들리 스콧, Blade Runner 1982)
공간 속에서 소통이 막힐 때 공간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펑크적 태도를 취한다. 마치 공간은 저항과 반항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스위스 취리히의 2000년 초엽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반항적인 모습을 하고 걸어간다. 남자 아이들은 치마를 두르고 루즈삭스를 신었으며 여자 아이들은 온갖 피어싱으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은 사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홍대 부근의 M2와 레드조커(클럽)에서 춤을 즐기는 클로버들의 공간이 제한적인 것처럼 말이다. 클로버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시인 춤을 클럽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보여주려고 한다. 왜냐하면 공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다른 요소가 일상의 공간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사회규율의 시선을 통해 공간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나타내려 한다.

물론 이런 해석의 역도 성립이 가능하다.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이 문을 닫는 시간, 한적한 저녁 무렵, 나는 자연사 박물관 뒤뜰마당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세계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왼발 곁에는 도버해협(Dover Str.)이 펼쳐져 있었고 내 오른발과 왼발 사이에는 영국과 아일랜드가 그려져 있었다.

그 때 은발의 중년 아주머니가 내 곁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발끝으로 가리켜 달라고 했다. 연한 청색 눈빛을 가진 여인은 자신의 고향은 잉글랜드의 레스터 부근이라며 구두 끝으로 그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는 곧 나에게 “당신의 집은 어디죠?”하고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는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고개짓을 했다.

내가 세계지도의 동쪽으로 발을 옮기자 나의 운동화 끝은 동유럽의 끝인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왔을 때 은발의 여인은 아직 흑해에 있었다. 나는 인도를 한번 내려다 본 후 방향을 틀어 벵골만 윗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내 두 다리의 콤파스 사이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쓱 지나가더니 이윽고 황해와 동해 사이의 한반도가 나타났다.

은발여인은 우즈벡키스탄에서 곧바로 극동으로 걸어왔기 때문에 중국대륙을 질렀다. 나는 은발여인에게 나의 고향을 왼발 운동화 끝으로 가리켰다. 한반도의 중간지점, 그곳은 서울이었다. 여인은 내 발끝을 내려다보며 매우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의 고향, 한반도의 서울이 이 영국여인에게는 매우 낯선 장소인 것이었다. 나에게 카리브 해의 도미니카 공화국이 낯선 장소인 것만큼이나 이 여인에게는 대한민국의 서울이 낯선 공간인 것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나에게 유럽과 아시아의 간극만큼이나 커다란 공간 인식의 지평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런던 자연사 박물관 뒤뜰 마당 바닥에 그려진 커다란 세계지도를 가로질렀을 때 그 밑의 지형에서 꿈틀거리는 역사의 켜, 대립과 충돌의 정치적 이해, 이 모든 문화-역사-정치경제학적 그물의 얼기를 돌파하는 길이란 점점 펑크한 태도를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무정부적인 시야를 가질 때 서로의 지형에 대한 편견없는 시각을 고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펑크정신은 근본적으로 저항적 정신이 반영된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내 생각에 공간은 점점 더 체제에 불응하리라 예상된다. 그것은 문화의 이름으로 펑크정신의 옷을 입고 나타날 것이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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