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고모부 박명원의 신도비
⑩ 고모부 박명원의 신도비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1.25 11:25
  • 호수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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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사위 중 가장 사랑했던 박명원

“내가 즉위한 지 14년째 되던 해(1789) 가을에 금성위 박명원이 상소했다. ‘우리 성상(聖上, 정조)을 생각하면, 갑오년(1774)에 원소(園所, 사도세자의 묘)를 배알하면서부터 병신년(1776)에 왕위에 오른 이후까지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원소가 편안한지 아닌지에 관한 것입니다. 저녁 종이 울리면 촛불을 켜고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가 않은데, 곁에서 몇 년을 지켜봐도 전하를 위해 그 일을 말하는 굳센 신하가 없으니 신은 매우 슬픕니다. 선왕들의 혈맥이 전해진 것이 성상뿐이고 300년 종묘사직을 위탁한 것도 성상뿐인데, 원소가 편안해져야 성상이 편안해지고 성상이 편안해져야 후손들이 백세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내가 작년(1789) 가을 이후로 그(박명원)를 나의 은인이자 훈구(勳舊)로 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략) 영조께서 여러 의빈(儀賓, 국왕의 사위)들 가운데 공을 돌보신 것이 특별히 융숭하여 베푸신 은혜가 다른 측근들과 확연히 달랐다. 우리 선군(先君, 사도세자)께서도 공을 가장 사랑하여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공에게 가서 자문을 구했고, 공이나 귀주(貴主, 화평옹주)는 감격하고 분발하여 그 결점을 보완하고 도와준 것을 외정(外廷)에서 알지 못하고 국사(國史)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아! 나는 늦게 태어났으므로 어찌 이런 일을 모두 알겠으며, 안다고 해도 어찌 차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시를 써서 주고받거나 시첩을 놓고 논평하면서 공과 은밀하게 뜻을 맞추던 일을 지금도 상상할 수가 있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가 작성한 『금성위박명원신도비명(錦城尉朴明源神道碑銘)』이라는 글이다. 박명원(1725~1790)은 1738년에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와 결혼하여 왕실의 친척이 되었는데, ‘금성위’란 국왕의 사위에게 주어진 작위였다.

박명원은 1780년에 조선 사신단의 대표로 북경을 방문하면서 집안의 아우인 박지원을 데려가 『열하일기』가 작성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은 영조와 사도세자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부인인 화평옹주는 어릴 때부터 영조의 사랑을 받았는데, 옹주는 사도세자와 함께 영빈 이씨의 소생이었다.

옹주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중간에서 주선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었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딸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사위에게 미쳤는데, 정조는 ‘영조가 여러 사위들 가운데 박명원을 가장 사랑했다’고 했다.

박명원은 처남인 사도세자와도 관계가 좋았다.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영조와 갈등이 생기면 자형인 박명원을 만나 답답한 심정을 호소했는데, 그럴 때마다 박명원 부부는 사도세자를 적극 후원했다. 정조는 이를 ‘은밀히 뜻을 맞추었다’고 했다.

박명원은 정조에게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가 늘 마음에 걸렸는데, 신료들 중에서는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이나 무덤 자리를 결정한 사람은 바로 영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명원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고, 마침내 천하의 길지라는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소(현륭원)를 조성하는 사업을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정조는 이런 박명원을 ‘자신의 은인이자 훈구 대신이라’고 했다. 현륭원을 조성한 이듬해에 박명원이 사망하자, 정조는 이 글을 지어 오랫동안 왕실에 헌신했던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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