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격몽요결』의 머리말
⑪ 『격몽요결』의 머리말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2.02 11:45
  • 호수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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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격몽요결』 벼루를 보고 감흥해 지은 글

 “이 문성공(文成公, 이이)은 내가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이다. 그의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읽으면서 그를 만난 것처럼 생각했는데, 근자에 강릉에 초본(草本) 『격몽요결(擊蒙要訣)』과 남겨진 벼루가 있다고 하므로 즉시 가져오게 하여 보았다. 글씨의 획이 새로 쓴 것처럼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 총명하고 순수하며 뛰어난 자질과 비가 갠 후의 바람과 달처럼 깨끗한 기상을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홀연히 문성공이 떠난 지 2백여 년이 지났음을 모르게 되었는데, 그 글을 읽기도 전에 그랬던 것이다. (중략) 이 책은 소학의 첫 번째 과정이다. 강릉의 자제들이 손때가 묻은 유품을 소중하게 여길 줄만 알고, 은혜롭게 물려준 뜻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 고을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기에 나아가 구하려 한다면 반드시 『율곡전서』를 읽어야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특별히 느낀 바가 있다. 지난번에 영남에서 이 문순공(李文純, 이황)이 직접 쓴 『심경』을 구했는데, 이번에는 또 이 책을 얻었다. 두 현인은 한 시대에 태어났고, 두 책이 나온 것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마치 기다린 것 같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유학의 기풍은 점차 멀어지고 성인의 말씀은 날로 사라져, 경연에 나갈 때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한탄을 멈출 수가 없다. 강릉은 공의 외가이고 공이 실제로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烏竹軒)이라는 곳이 그곳인데, 뒤에 권씨의 소유가 되었고 이 책도 그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권씨의 선조는 공에게 이종 친척이 된다. 이렇게 기록하고 나서 다시 벼루에 명(銘)을 새겨 돌려보낸다.”

정조가 1788년(정조 12)에 작성한 「제율곡수초격몽요결(題栗谷手草擊蒙要訣)」이라는 글인데, ‘율곡이 직접 기록한 『격몽요결』의 첫머리에 쓴다.’는 뜻이다.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가 초학자의 교재로 만든 것인데 그가 해주에 거주하던 1577년(선조 10)에 완성했다.

강릉의 오죽헌은 이이의 외가인데, 이곳에는 그의 친필로 된 『격몽요결』이 정조대까지 전해졌다. 정조는 『율곡전서』를 읽으면서 이이를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이가 쓴 『격몽요결』과 그가 사용하던 벼루가 오죽헌에 전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조는 즉시 사람을 보내 궁궐 안으로 가져오게 했고, 책을 펼치자마자 선명하게 나타나는 이이의 글씨를 보면서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한 것 같았다. 정조는 감흥을 살려 이 글을 지었고,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이병모에게 이를 책머리에 쓰게 했다.

또한 벼루의 뒷면에는 자신이 지은 18글자의 명(銘)을 새기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원(주자)의 못에 적시고,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풀었도다. 용(이이)은 동천(저승)으로 돌아갔지만, 구름(명성)은 먹을 뿌려, 학문이 여기에 남았네. 涵?池 象孔石 普厥施 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정조의 글이 들어있는 책과 벼루가 도착하자, 오죽헌에서는 특별히 어제각이란 건물을 지어서 모셨다.

어제(御製), 즉 국왕이 지은 글을 모셨기 때문에 ‘어제각’이라 했다. 현재 이이의 친필에 정조의 글이 들어있는 『격몽요결』은 보물 제60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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