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 이충렬(국문·74학번) 동문
작가 인터뷰 | 이충렬(국문·74학번) 동문
  • 김은희 기자
  • 승인 2008.12.02 20:23
  • 호수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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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시절 논문발표대회 최우수상 수상하기도개인 블로그에 글 게재 후 김영사로부터 출판제의 받아

『그림애호가로 가는 길』의 저자 이충렬(국문·74학번) 작가는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76년 11월 가정사정으로 인해 우리대학 문리과대학 국어국문과를 중퇴하고 이민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추억을 쌓기 위해 보길도 여행을 함께 떠났던 친구로 인해 글을 계속 쓰게 됐다고 말한다.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친구는 ‘자, 떠납시다’라는 시를 지어 발표했고, 1975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그는 이민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시와 함께 받은 ‘우리의 모국어를 영원히 사랑하기를 바라며 이국의 낯선 하늘 아래서도 이 겨레의 한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의 친구 메모를 떠올리며 계속해 글을 썼단다. 그 친구가 바로 예술대학 김수복(문예창작) 학장이다.

 

이처럼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데에는 김 학장과의 애틋한 우정이 서려있다. 이 작가는 재학시절 문리과대학 주최 논문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현대문학부 부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문학지망생이었다. 1975년 2학년이었을 때는 학과대표를 맡아 당시 우리대학 처음으로 MT를 제안하기도 했다.

 

황패강 교수가 학과장있었던 때에는 150여 권의 책을 국어국문학과에 기부, 몇 년 전까지만해도 그의 이름을 딴 ‘충렬고’가 우리대학 내에 존재했었다. 그는 “재학 중이었던 70년대에는 낭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학교 앞 대포집에 시계나 학생증을 맡기고 한 달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의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밤 늦도록 연극, 시화전을 준비하고, 낭만적 여유를 가졌던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의 생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훈훈함과 정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민 후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생활전선에 곧장 뛰어들었다. 현재는 멕시코 국경이 건너다보이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시골 마을에서 잡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 작가는 가고 싶어도 자주 못 가는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임효의 ‘꽃비’를 시작으로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쌈짓돈을 모아 산 것으로, 사는데 든 돈이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피로가 사라지고, 고향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졌다”고 말한다. 미술 관련 글에 있어 무명필자였던 그가 국내굴지의 대형출판사로부터 이례적으로 먼저 출판제의를 받은 것은 인터넷의 힘이 크다.

2년 전 개인 블로그에 게재했던 글이 3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그걸 보고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작가는 “학생들도 독특한 자기개성이 담긴 글을 계속해서 쓴다면 누구라도 책을 쓸 수 있고 대형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을 수 있다”며 전했다.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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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morikam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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