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국왕이 열람하는 실록,『국조보감』
⑧ 국왕이 열람하는 실록,『국조보감』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1.11 14:34
  • 호수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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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말씀과 행적 담은 ‘현재의 절실한 기록’

“실록(實錄)과 보감(寶鑑)은 모두 역사서이지만 그 체제는 다르다. 크고 작은 일의 득실을 모두 기록하여 명산에 간직하고 만년 이후를 기다리는 것은 실록이고, 선대 국왕의 말씀이나 행적 가운데 훌륭한 것을 뽑아서 특별히 기록하고 밝게 드러내어 후대 국왕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은 보감이다. 이 때문에 실록은 비밀스럽지만 보감은 드러나고, 실록은 먼 훗날을 기약하지만 보감은 현재에 절실하다.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중략) 선왕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기록하여 덕성과 사업을 겸비하고, 간략하면서 빠트린 것이 없고 미더워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책으로는 우리 조선의 보감만한 것이 없다. 보감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국조보감』은 태조, 태종, 세종, 문종 등 4대를 수록한 것에서 끝나고, 선조의 『선묘보감』과 숙종의 『숙묘보감』은 각각 하나의 책이 된다. 그 나머지 국왕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아름답긴 하지만 미비한 점이 있다. 정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중종, 인종, 명종, 인조, 효종, 현종, 경종 등 12대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실록이 명산에 보관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누가 찾아서 보겠는가? (중략) 이에 관각(館閣)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12대의 실록을 찾아서 편을 나누어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듬해 3월에 작업이 끝나 12대와 선왕들의 보감이 모두 완성되었다. 이에 4대의 보감과 『선묘보감』과 『숙묘보감』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세대별로 순서를 정해 그 이름을 『국조보감』이라 하니, 모두 68권이다.”

정조가 1782년(정조 6)에 작성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서문이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기록을 꼽으라면 실록을 들 수 있다. 국왕이 사망한 후에 작성되는 실록은 훌륭한 기록이긴 하지만 춘추관이나 사고(史庫)에 보관하기만 하고 국왕이 열람할 수는 없었다.

정조는 실록을 가리켜 ‘만년 이후를 기다리는 책’이라 했는데, 이는 후대의 평가를 위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역대 국왕의 훌륭한 말씀과 행적을 뽑은 『국조보감』은 국왕이 쉽게 볼 수 있는 책이므로, ‘현재에 절실한 기록’이자 ‘국왕이 열람하는 실록’이었다.

『국조보감』은 후대 국왕에게 유용한 책이지만, 정조가 즉위했을 때에는 3종의 보감만 나와 있었다. 1458년(세조 4)에 편찬된 『국조보감』에는 태조를 비롯한 네 국왕의 말씀과 행적이 수록되었고, 선조와 숙종의 보감이 별도로 나와 있는 형편이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뺀다고 하더라도 열 두 국왕의 말씀과 행적은 살필 수가 없었다. 정조는 영조의 보감을 편찬한 후 홍문관과 규장각에 소속된 관리들에게 열 두 국왕의 실록 기록을 검토하여 훌륭한 말씀과 행적을 뽑도록 했다.

관련 기록이 뽑혀지자 이전에 나온 보감과 합쳐서 각 국왕 별로 편집하고, 책의 이름은 처음의 『국조보감』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결과 정조대에는 태조에서 영조에 이르는 열여덟 국왕의 『국조보감』이 모두 갖추어졌다. 『국조보감』을 완비하려 했던 국왕은 영조였는데, 정조는 할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사업을 계승하여 마무리했다.

정조는 이 책을 통해 선대 국왕들의 마음가짐과 사업을 파악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생각했다. 후대의 국왕들은 정조의 사업을 계승하여 『국조보감』을 계속 편찬해 나갔고, 『국조보감』은 조선만이 가진 독특한 책이 되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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