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따님의 집을 방문한 영조
⑦ 따님의 집을 방문한 영조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8.11.04 13:43
  • 호수 12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조가 옹주의 집에 행차한 기록

“영조 46년(1770) 7월 28일, 상(영조)께서 기로소 영수각(靈壽閣)에 가서 전배례(展拜禮)를 거행했는데 소자(정조)가 이를 수행했다. 가마가 돌아오려 할 때 상께서 소자를 보시며 “내가 오랫동안 옹주의 집을 가보지 못했다. 지금 너와 함께 가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셨다. 소자는 절을 하며 “영수각에 참배하신 것은 효(孝)에 해당하고 옹주의 집에 가시는 것은 자(慈)에 해당합니다. 효덕(孝德)과 자덕(慈德)의 덕이 드러날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상께서 “좋다.”고 하시며 소자에게 수레를 따르게 하고 옹주의 집을 방문하셨다. 집 안에선 밤새도록 국왕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는데 매우 즐거워하셨다. 옹주의 집에서 보면 이 일은 전례가 없는 영광이요, 소자의 입장에서는 아랫사람을 보살피는 감사함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소자는 비록 옹주의 집에 가서 즐기려 해도 되지를 않았는데, 성상께서 아랫사람의 정을 잘 보살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중략) 우사(虞史)에서 요(堯) 임금의 덕을 일러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친히 하시니, 구족이 이미 화목해졌다.”고 하였는데, ‘친히 하는 것’은 요 임금의 덕이요, ‘이미 화목해졌다’는 것은 구족이 요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 성상의 효덕과 자덕은 구족을 친히 하는 근원이 되므로, 성상의 뜻을 본받아 화목하기에 힘써서 구족을 친하게 하는 교화를 돕는 것은 옹주 집안의 사람과 소자가 힘써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1770년(영조 46)에 정조가 작성한 ‘국왕의 가마를 수행하여 옹주의 집에 행차한 기록(陪駕幸主第引)’이라는 글이다. 7월 28일에 영조는 기로소를 방문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근에 있던 따님의 집을 들렀다. 이 날 동궁의 신분으로 영조를 수행했던 정조는 모든 행동을 함께 했다.

기로소란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고위 관리들을 우대하기 위해 세운 관청으로, 70세 이상의 문반 관리로 2품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람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60세를 넘기면 기로소에 입소할 수 있었는데, 태조, 숙종, 영조가 그 주인공이다. 국왕이 기로소에 입소하는 행사는 기왕에 기로소에 입소했던 선왕의 이름이 기록된 책자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인데, 영수각은 바로 이 책자를 보관하는 건물이었다.

따라서 영조가 영수각을 참배한 것은 기로소에 입소한 선왕들에 대한 효성(孝誠)을 표현하는 행사였다. 기로소를 방문한 영조는 바로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따님의 집을 방문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이날 향교동(鄕校洞)에 있는 옹주의 집을 들렀다고 하는데, 향교동에 있던 화순옹주의 집과 화완옹주의 집 가운데 어느 집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두 사람은 모두 정조의 고모이므로, 정조는 오랜만에 고종사촌들을 만나 즐겁게 지낼 수가 있었다. 정조는 영조가 따님의 집을 방문한 것은 어버이로서의 자애(慈愛)를 보인 것으로 해석했다. 정조는 영조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정조는 ‘요 임금이 큰 덕을 밝혀 친족을 친하게 하자 친족들이 화목해졌다’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과 고종 사촌들이 친하게 지낼 기회를 만들어 준 영조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제안했다. 효를 실천하려면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과 함께 동기(同氣)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