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새해의 권농 윤음
⑫ 새해의 권농 윤음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01.05 17:44
  • 호수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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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에도 임금의 도리를 실천한 젊은 국왕

“오늘은 내가 즉위한 원년(元年)의 새아침이다. 역대 국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신 덕을 본받아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산업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란 ‘농(農)’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 나는 노련한 농사꾼에 대해 배우지 못했으니 농사짓는 어려움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상서』 <무일(無逸)>편의 경계와 『시경』 <칠월(七月)> 시에 대해서는 악공(樂工)이 노래하는 것을 대강 들은 적이 있다. (중략)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노력한 대가가 관청에 바칠 세금을 내기도 부족하니, 풍년이 들어도 아내와 자식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부짖고, 흉년이 되면 노약자들은 구덩이에서 죽어 간다. 게다가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농사를 장려하는 선정을 보이지 않으니, 일없이 놀고먹던 자는 대부분 거지꼴이고, 가난한 백성들이 울부짖는 모습이 내 눈에 선하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차마 어찌 이 백성들에게 낭패를 겪게 할 수 있겠는가. (중략) 아, 너희 관찰사와 목민관들은 내가 밤낮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헤아리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밭갈이를 돌아보고 농사를 장려하여 그들이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물을 대고 제방을 터서 실질적인 혜택이 가도록 강구하라. 그리하여 땅에서는 버려진 이익이 없고 백성들은 생업에 정착하게 하여 내가 처음 즉위하여 근본에 힘쓰는 정사를 돕도록 하라.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

정조가 1777년(정조 1) 새해에 발표한 권농 윤음이다. 여기서 ‘권농 윤음’이란 ‘농사를 권장하는 국왕의 명령서’라 할 수 있는데, 조선의 국왕들은 매년 새해가 되면 권농 윤음을 반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1777년은 국왕 정조가 처음으로 맞은 새해였으므로, 이는 정조가 첫 번째로 발표한 권농 윤음이 된다.

조선은 국가의 주요 산업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그 해 농사가 풍년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매년 새해가 되면 백성들은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고 지방관들은 이에 대한 행정 지원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 초기부터 경제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맞고 있었다.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흉년이 들어 국가에 낼 세금이 부족할 상황이었는데, 특히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은 사정이 심각했다. 이곳은 거듭되는 가뭄과 홍수, 바람, 우박 같은 자연 재해 때문에 추수를 제때에 하지 못했고, 세금은 고사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진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 길거리에 나서서 떨고 있었다.

이제 막 국왕이 된 정조로서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어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기는커녕 길거리를 떠돌게 했으니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백성들을 구제할 대책을 마련하고 관찰사나 지방관,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마다 직접 만나 실천할 방안을 일러주었는데, 종자와 식량이 모자라는 자에게는 쌀을, 밭갈이 할 소를 마련하지 못한 자에게는 소를 제공하여 농사를 제때에 지을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정조는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도 했는데, 사정이 심각한 강원도나 함경도 지역의 사대부 가운데 비축해 둔 곡식을 내어 곤궁한 이웃을 구제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에서 크게 포상하겠다고 했다. 정조는 국가의 창고를 모두 열어서라도 굶주린 백성이 죽음을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며,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이라면 지방에서 일단 시행을 하고 사후 결재를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26세의 젊은 국왕은 국가 경제가 위급할 때 최우선 과제는 백성을 구제하여 각자의 생업으로 복귀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상 유례가 드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유념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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