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드라마 작가 노희경을 만나다
피플-드라마 작가 노희경을 만나다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9.03.03 16:39
  • 호수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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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MBC '세리와 수지'로 드라마 작가로서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96년에는 단막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로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굿바이 솔로', '그들이 사는 세상' 등의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작가님께
작가님의 드라마를 보면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어떨 땐 자신의 과거에 솔직해 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기도 하며, 또 어떨 땐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드라마를 ‘文學’의 범주에 넣는 것을 꺼려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면, 우리는 드라마를 ‘文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편집자 주>

 
▲언젠가 작가님 강연회에 갔을 때 가족 이야기와 같이 정말 사적인 부분들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거든요. 사람마다 숨기고 싶거나 부끄러운 과거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강연회에서 그런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한다는 것이 창피하다거나 꺼려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궁금했어요.

 


한때는 있었죠, 당연히. 사람들이 나를 멋있게 봐 줬으면 좋겠다는 감정 있잖아요. 사실 우리들은 포장에 길들여져 있거든요. 당연히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피곤하다는 감정을 느꼈어요. 그냥 인사치례 하기 위해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누구나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쟤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 하지만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쟤는 행복하다고 말 하지만 별로 행복한 거 같지 않아’라는 느낌들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어디에서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까 ‘아, 나도 내 얘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는구나’라는 결론을 얻었죠. 내가 솔직하게 얘기 하지 않는 것처럼 저 사람도 그렇겠구나, 라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가로서 위기의식을 느꼈어요.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아서 위기의식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시청률이 잘 나오면서도 위기의식을 느끼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마다 한계라는 게 찾아오고, 드라마 하나 잘 됐다고 해서 다음 드라마가 잘되리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아, 어쩌면 사람들이 서로 말하지 않을 뿐 누구에게나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 얘기를, 어머니 얘기를, 또 내 얘기를 이렇게 저렇게 포장하다 보니까 할 얘기도 없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들 포장했다는 건 우리 가족들은 뻔히 알 거 아니에요. 특히 가족이 가장 걸렸어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들, 내가 포장하는 것들에요.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를 포장하고 감춘다는 건, 결국 내가 그런 가족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그럼 형제들은 ‘내가 너한테 부끄러운 가족이었냐?’라는 상처를 받게 되는 거죠.


드라마를 쓰면서 이런 고민들을 진지하게 하게 됐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도 우리 집안 이야기가 있고, 마포를 배경으로 한 「내가 사는 이유」에도 아주 가난했던 우리 집안 이야기가 있어요. 이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결국 내 경험과 가족으로부터 나오는 건데, “우리 가족은 이렇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고 다니는 건 결국 드라마에 나온 이야기들이 전부 거짓말이 되는 거잖아요.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작가는 아픔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한테도 우리 집이 못 산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기 시작했죠. ‘작가가 되려면 이정도 아픔은 있어야 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한테 그런 ‘솔직함’은 큰 콤플렉스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강연회나 인터뷰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솔직함’은 사실 더 많은 갈등이 있었죠. 그 첫 번째가 조금 전에 이야기 한 포장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나도 힘들지만 우리 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요. 그러면서 조금씩 용기를 냈고, 용기를 낸 후의 파장은 별 걱정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너희 아버지 왜 바람피웠냐”고 놀리면, 난 지금도 놀리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너희 가족 왜 그렇게 가난하냐”고 놀린다면, 가난하다고 놀리는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우리 조카들 - 오빠가 이혼해서 지금 나랑 같이 사는데 - 걔네들한테도 그래요. 친구들이 고모랑 사는 너희들을 놀리면 이렇게 말 해줘요.

 “네가 만약 아이들이 놀리는 것이 너무나 걱정스럽고 싫으면 거짓말해라. 그건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거짓말 하는 건. 이 사회가 만든 거다, 일정 부분은. 그런데 네가 계속 거짓말 하면 참 불편할 거다. 그러니까 친한 친구 한 두 명한테만 말 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정말 지혜로워야 할 건 부모님이 이혼한 것이 부끄러워야 할 일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갖고 놀리거나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의 행동이 부끄럽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다”라고 했거든요. 솔직함을 갖고 손가락질 하거나 놀리는 사람들이 잘못 하는 거죠, 솔직한 사람이 잘못 하는 거는 아니죠.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 하잖아요. 작가님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를 봐도 과거를 부정하거나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특히 ‘유지안’이라는 인물이 많이 공감됐거든요.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스스로의 과거를 숨기는 것이나, 더 나아가 포장하고 남들을 속이는 모습이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어느 날 그런 솔직함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어느 것도 나를 상처 줄 수 없다. 다만 거기서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말을 우리 조카들한테도 자주 해 주거든요. 이런 것을 느끼면 오히려 부끄럽다고 느낄 수 있는 자신의 과거가 자랑이 되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내 과거에 있었다는 거죠. 인생을 사는 지혜를 남들보다 미리 배웠다는 거잖아요. 자랑으로 삼아야지 상처가 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차이가 있다면 그런 과거를 자신의 상처로 부여잡느냐, 아니면 소중한 자산으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경험은,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남들도 그만큼 솔직하게 이야기 해 준다는 거죠. 마치 목욕탕에서 남들 옷 벗으니까 나도 벗는 것처럼 말이죠.

 

▲“꺾인다”는 표현이 조금 우습긴 한데요, 드라마나 책을 보면서 제가 기존에 ‘확고하다’고 가졌던 생각들이 대나무 꺾이듯 변할 때가 있거든요.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면서 변하게 된 최근의 제 생각들처럼요. 작가님도 글을 쓰시면서(또는 많은 글을 읽으시면서) 변화한 생각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계기들이 궁금합니다.


자기가 변한 것을 “생각이 변했다”라고 말 하는 것이 참 힘들어요. 왜 우리 정치가들이 어떤 정책을 펼 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실수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에요. “내가 틀렸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힘든 거죠.


생각이라는 거, 결국은 다들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 경험한 상황과 여건이 달랐다면 당연히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하게 되는 거죠. 상황이 변하면,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 번 했던 생각을 다시 바꾸는 것을 어마어마한 잘못이라고 생각하곤 해요. 나는 한 번 옳으면 계속 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잃는 거죠.


실수를 인정하는 게 처음에는 힘들지만, 한 두 번 하다 보면 나중에는 편해져요. “그 때 나는 그렇게 생각 했는데 그런데 지금 보니까 아닌 것 같네”라고 하면, 나 스스로가 자유로워질 수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변절’이라고 얘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장’이라고 얘기하는 거 같아요. 사람 말에 좌지우지 될 게 아니라 내가 성장했느냐고 느끼면 성장 한거에요. 사람들이 나보고 변절했다고 해서 변절되는 것도 아니고, 성장했다고 평가해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던 상관은 없는데요, 이미 겉으로 드러난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경우 갈등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왜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누군가가 너무 싫어서 사람들에게 “아 저 사람 정말 싫다”고 겉으로 얘기 하면, 나중에 그 사람의 장점을 봐도 계속 밉게만 보게 되는 경우요.


저도 정말 싫어하는 작가가 있었어요. 그 친구의 작품을 계속 싫어해왔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질투였죠.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그 사람 작품 좋다고 말 하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천천히 그 드라마를 봤는데 배울 점들이 보이더라고요.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너 정말 좋은 작가다. 내가 너한테 질투도 있었고 시기도 있었는데 작품 정말 좋더라”라는 말을 하는데, 그동안 어디 가서 험담하고 싫은 소리 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말하는 순간에도 떨리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연습을 많이 했고, 이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극복이 됐어요. 이중인격자처럼 보일까봐 걱정되고 불편하죠? 바뀐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보세요.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지고, 예전에 싫어하던 사람을 인정하면서 그 친구의 장점까지도 배울 수 있어요. 쉽지 않아요, 정말 많은 연습이 필요해요.


누군가를 싫어한다, 미워한다는 마음은 어쩌면 시기나 질투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작가들 사이에서도 ‘너무 자기 색깔을 고집해서’, 또는 ‘너무 대중성만을 쫓아서’ 등등의 이유를 대며 서로 싫어하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질투를 질투로 인정하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보고 진심으로 좋은 말을 해 주면, 결국 그 사람들로부터 기분 좋은 말들을 들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대학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드릴게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소위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에만 치중하면서 점점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타인과의 대화가 힘든 요즘의 ‘대학·사회’에 들려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지금보다 좀 더 따뜻한 사회를 위해 당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려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를 잘 챙기면 남이 배려가 되는데요. ‘나’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나요?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 일단 말하려 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해보세요. ‘나’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내 이야기도 잘 전달할 수 있어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에요. 자기를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행의 조건이 있거든요. 나도 좋고 남도 좋을 때 진정한 선이라는 거죠. 나만 좋아도 선이 아니고, 남만 좋아도 선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대화에도 적용해 보세요. 내가 좋은 대화를 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주세요. 그러면 쉽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솔직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솔직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포장하면서 상대가 포장하지 않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거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분명히 일 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다그치게 되는 경우도 생겨요. 저도 예전엔 ‘독하다’는 말을 듣는 게 은근히 좋았거든요. 독하다는 말을 ‘카리스마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었어요. 독하다는 것이 성실의 잣대가 될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 어느 날 스스로 ‘독하다는 이미지가 어떤 사람일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참 싫은 모습이더라고요.


우리 대학생들이 나 스스로에게 철저하면서도 남한테는 관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내가 프로 의식 갖고 일 하는 만큼, 남들도 그렇게 일 할 거라고 인정하는 관대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박준범 기자
박준범 기자

 psar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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