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동(경희대) 교수
우기동(경희대) 교수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9.04.3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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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를 꿈꾸는 우기동(경희대) 교수를 만나다

 영화 <매트릭스>에 관한 글을 쓴 킹스칼리지 철학과 윌리엄 어윈 교수는 “어째서 매트릭스와 같은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어’ 상아탑이라는 제도의 틀을 허물고 기초 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한 철학자가 있다. 경희대학교 철학과 우기동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 주>


▲ 우기동 교수는 미국의 얼쇼리스가 노숙인과 빈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한‘클레멘트 코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2005년 성공회의 노숙인 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시작. 현재는 대학과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
▲저소득층의 경우 경제적 문제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만큼 중요할 텐데요, 이러한 분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시면서 느끼신 ‘사람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우리가 대개 사회적으로 행복의 질을 이야기 할 때 사람들끼리 통용되는 지표가 있죠. 연봉이 얼마고, 집이 몇 평이고, 외식을 몇 번 하느냐 등등의 기준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지표들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심리 상태에 참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부탄과 같이 자본주의 경제 기준으로는 거의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의 행복지수는 예상 밖으로 최상위 권에 속하거든요. 우리나라가 80∼90등에 오르는 걸 보면 대조적이죠. 즉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이다’라는 것은 주관적 심리상태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저소득층 사람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고 나서 ‘나도 시를 쓸 수 있고 나도 당당하게 살 수 있구나’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 ‘돈이 내 삶에 자신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변화를 느끼게 되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자활이 중요한데 하루 세끼 먹기 바쁜 사람들한테 무슨 인문학을 가르치느냐는 말도 합니다. 그럼 나는 이렇게 얘기 하죠. 경제적·사회적 환경차를 갖고 그 분들 인격 모독 하지 말라고 말이죠. 세끼 밥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 ‘인간답게 살게 해준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 역시 인간다움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계시잖아요. 다만 여유가 없었고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사람의 행복이란 주관적 심리상태입니다. 재벌 총수가 검찰청에 잡혀가고, 가족 중 누가 자살을 하고…이러면서 한편으로 ‘내가 이런 일 겪으려고 재벌 됐을까’라는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권력이나 명예나 돈과 같은 사회적 통념에 따른 행복의 기준을 갖고 바라보니까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사람은 다 똑같잖아요.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차이가 날지 몰라도 사람은 모두 똑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면 행복의 기준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록 한 달에 60∼70만원 갖고 살아도 정신적 가치에 대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겠다’는 주관적 심리상태를 가질 수 있더라고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다 보니 부탄이라는 나라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하다고 느끼나봅니다. 에릭 프롬이 ‘사회적으로 정형화 된 결점’이라는 말로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개인의 윤리(행복)를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우리 대학과 사회 역시 개인이 느끼지 못할 만큼 정형화 된 결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취업 또는 경제적 성장만이 행복의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예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교수님께서 평소 갖고 계신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형화 된 결점을 교육과 연계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원래 교육은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그 형태에 따라 온전히 키워내는 것이라는 정의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최근 일제고사가 부활하는 등 학생들을 줄 세우기 하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육에서조차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최고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됐다고 볼 수 있죠.

교육 제도가 좋다는 핀란드를 보면 우리나라와 큰 대비를 보이죠.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시험 시간을 예로 들어볼게요. 핀란드의 경우 시험을 보다가 한 학생이 문제를 잘 풀지 못하면 감독을 보는 선생님이 와서 힌트를 준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도와주면 능력을 계발시켜줄 수 있다는 관점이죠.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일제고사를 보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교사는 당연히 징계를 받겠죠. 이런 것이 두 나라의 분위기 차이입니다. 언젠가 스위스에서 조사한 교육부문 평가에서 핀란드가 1위, 그리고 우리나라가 2위를 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때 평가를 담당했던 관계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했던 말이 “핀란드는 행복한 1등이고 한국은 불행한 2등이다”래요.

그들이 볼 때 한국과 같은 2등은 정말 필요한 2등이 아니라는 거죠. 핀란드의 교육 협회장도 우리나라에 와서 “경쟁은 스포츠에서나 재미를 위해 필요한거지 교육에서 왜 경쟁을 하는 건지 이해가 힘들다”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죠.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교육 풍토에도 적용돼, 줄 세우기 경쟁을 하는 겁니다.

인디언들이 초창기 미국인들로부터 국민교육이라는 것을 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험지를 나눠주고 테스트를 하려고 하니까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의논을 하더래요.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각자 시험을 보라고 하니까 애들이 하는 말이 “우리 마을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른들이 모여서 상의해요”였다는군요.

굉장히 큰 의미가 있죠. 저런 것이 교육이거든요. 영재교육이라는 말, 5%가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말로 뭔가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어요. 영재는 보편교육 속에서 나오는 것이죠. 따로 떨어뜨려 놓고 교육하는 것은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면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 그런 불행한 아이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요?

사회적 단절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죠. 일제고사를 보는 날 체험학습을 보냈다는 이유로 어떤 교사가 파면 당했습니다. 만약 기업에서 어떤 직원이 조직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면 당연히 그 기업의 생존을 위해 직원을 파면시키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사회는 교사를 파면시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파면을 시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남게 되잖아요. 물론 교사가 아닌 형태로 남아 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습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은 전체 구성원들을 다 보면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리더는 덕(德)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내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도 다 돌봐야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의미에서 교육적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전체의 구성원을 보며 나라 살림을 꾸려가야 한다는 관점 말입니다. 교육행위를 하는 사람은 어떤 누구라도 애달픈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교육자죠. 부모가 자식들 여럿 키우는데 경쟁 시켜서 못 하는 아이를 포기하지는 않잖아요? 자본주의적 회사는 물론 다르지요. 하지만 자본주의적 회사 운영의 관점을 사회의 최고 가치로 두고 교육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인문학적 가치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죠. 공기가 오염되면 정화시켜야 하고 물이 오염되면 정수시켜야 하듯, 정신적 가치가 오염되면 맑게 만들어야겠죠. 인문학의 ‘효용적 가치’가 여기에 있을 테고, 아마 ‘사회적으로 정형화 된 결점’을 맑게 만들 수 있는데 인문학이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인문학 강좌를 들은 분들이 변화한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사실 그런 사례를 갖고 쓰면 전집을 내도 모자랄 만큼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 소재를 갖고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을 하는데 웬만해서는 제가 말리는 편입니다. 그 분들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게 어쩌면 또 다른 인문 정신을 위배하고 그들을 대상화 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의미에서 개개의 소소한 사례보다는 전반적인 의식 변화에 대한 예를 들어보죠. 복지비가 삭감됐을 때 그런 정책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을 ‘동냥한다’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인문학 과정을 수료하고 난 후 ‘사회 전체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정치적 의식의 변화, 포괄적으로는 사회의식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노숙인의 경우에도 경제적 지원만 받은 사람들보다는 인문학 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이 자활에 성공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존감을 통해 자신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 특히 철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가치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학생들이 철학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학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생각을 하면 취업과 직결되지 않는 학문이 매력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인문학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사회 속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인문학 자체를 놓고 본다면 효용성을 찾을 수 없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지금껏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문학의 가치는 매우 큽니다. 자본주의적 기능성으로 인해 마치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이지만, 인간이 삶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어느 순간 ‘내가 왜 살고 있지?’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이고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의 가치는 재평가를 받을 겁니다. 단순히 교양 과목 늘리고 인문학 전공 지원자들에게 장학금을 더 많이 주고 하는 것은 미봉책입니다. 사회 속에서 맞물려 가야겠죠.

요즘 들어 자신의 전공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서는 제자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저는 “내가 너희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는 못하지만, 너희들은 분명 누구보다 자신감을 갖고 행복하게 살 거다”라는 이야기를 해 주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철학이 갖는 가치, 인문학이 갖는 가치를 스스로 느끼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새롭게 갖는 학생들을 보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박준범 기자
박준범 기자

 psar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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