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강의실은 시끄러울수록 좋다
민주주의와 강의실은 시끄러울수록 좋다
  • 조영갑(언론홍보·4)
  • 승인 2009.07.09 12:15
  • 호수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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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교수님의 주장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똬리를 틀고 있던 ‘반골정신’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할까. 그전에 주위 학생들의 표정을 살핀다. 고요한 얼굴들. 작은 돌일지라도 잔잔한 수면이라면 파문(波紋)은 커지는 법이다. 이 질문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한다. 용기를 낸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장면2.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라고 앞줄의 학생이 외쳤다.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린다. “쳇, 맨날 잘난 체 하지”, 옆 자리의 여학생들이 투덜거린다. 뒷자리의 남학생은 낮게 육두문자를 뇌까린다. “XX 시간 다 됐는데…”, 시계를 보니 수업 끝날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아뿔싸, 질문의 내용으로 보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커뮤니케이션학 이론 중에 ‘침묵의 나선이론’ 이라는 게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견이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묵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는 게 요지다. 대충 이런 얘기다. 남학생 다섯 명이 가요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하자.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사람이 네 명, ‘카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이다.

이럴 때 이 한 명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섣불리 ‘카라’를 옹호했다가는 왕따를 당함은 물론이요, 애꿎은 다섯 소녀를 욕먹게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의 강의실도 다르지 않다. 대신 여긴 침묵이 ‘절대 다수파’다.

과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는 ‘침묵의 나선’이 좌중을 휘감고 있다. 나선을 끊고자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토론하자고 덤볐다가는 학생들에게 “쟤 미?” 라는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내 생각이 다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 자체가 대세이기 때문에 말을 못한다.

반면, 필자가 귀동냥으로 들은 외국의 강의실은 달랐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기보다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에 충실하다고 한다. 학생들은 그 멍석위에서 뛰어놀면 그만이다. 반론과 재반론이 종횡으로 교차한다. 엉켜버린 실타래는 말미에 교수가 깔끔하게 풀어준다.그야말로 ‘토론의 나선’이다.

왜 이렇게 다를까. 한국 학생들은 수업 준비를 잘 안 해오니까? 한국의 강의는 토론이 필요 없을 정도로 치밀해서? 여러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일종의 토론 포비아(공포증), 의견표출 포비아가 그 주범이다.

‘진도를 빼는데 방해되는 일체의 발언을 삼가자’는 주입식 교육과 ‘어른이 말씀하실 땐 잠자코 듣는 거야’라는 유교적 사고관의 결합. 이게 포비아의 화학공식이다. 팔딱거려야 할 개체들이 침묵의 구덩이 속에 함몰되는 형국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최근에는 토론식 수업이 많이 늘어났다.

토론 및 발표 점수 비중도 높아져 ‘제법 까부는’ 학생들이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침묵을 토론의 나선으로 교체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만큼 포비아의 더께가 두껍다는 뜻일게다. 교수님들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공포는 때로 공포로 치유되기도 한다.

일부러라도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발표와 토론을 유도해 보라. 수업준비가 충실해짐은 물론, 버릇없어진(?) 학생들이 던진 역질문에 교수 자신도 긴장하게 돼있다. 동반상승 효과다. 민주주의와 강의실은 시끄러울수록 좋다.

조영갑(언론홍보·4)
조영갑(언론홍보·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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