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과거제도의 변통에 관한 윤음
⑮ 과거제도의 변통에 관한 윤음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07.10 16:10
  • 호수 12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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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면 통하고 통하게 되면 오래 간다는 개혁 소신 피력

내가 듣기에 송나라 학자 정호(程顥)는 “천하의 일은 크게 변통하면 크게 이롭고, 작게 변통하면 작게 이롭다.”고 했다. 지금 조정의 큰 폐단으로는 과거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요행으로 차지하는 사람들이 넘쳐나 해마다 심해지고 날마다 심해지니,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 날이 얼마나 남았겠는가? (중략)

우리나라 과거는 제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며 폐단이 생겼고, 명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조정에서 과거를 시행한 것은 한정이 없었으나 적합한 인재를 얻었다는 칭찬을 듣지 못했고, 합격자가 연이어 나왔어도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없었다.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한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략)

지금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개혁을 하는 방법은 옛것을 모른 채 현재의 제도에 빠져도 안 되고, 현재의 제도에 막혀 옛것을 소홀히 해도 안 된다. 옛 제도와 지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현 상황에 맞는 방도를 찾는다면, 주나라의 향거제(鄕擧制)를 모방할 수 있고, 명나라의 격옥제(隔屋制)에 견줄 수 있을 것이며, 한나라의 효렴제(孝廉制)를 일으킬 수 있고, 주자가 주장한 분년제(分年制)를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과연 옛 뜻을 잃지 않으면서 오늘에 적합하게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정부와 관각(館閣)의 신하들은 각자의 논의를 보고하라.

1776년에 정조가 발표한 윤음으로 과거제도를 변통할 방안을 올리라는 명령서이다. 이 글의 원 제목은 ‘과제변통윤음(科制變通綸音)’이다. 과거제란 오늘날의 고시처럼 몇 개 과목의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던 방법을 말하는데,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은 한나라 때였다.

그보다 앞선 주나라에서는 이선법(里選法)이란 제도를 사용했는데, 이는 지방관이 관할 지역의 인재를 뽑아 중앙에 추천하던 천거제를 말한다. 과거제는 본인의 출신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제도였으므로, 신분제가 우세하던 시대에는 장점이 많은 제도였다.

그렇지만 몇 개의 시험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린 인재가 과연 복잡한 국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과거제와 천거제의 장단점을 거론하며 논란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고, 대체로 과거제를 위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천거제의 장점을 도입하는 방식이 이용되었다.

정조는 국왕에 즉위하자마자 과거제의 폐단을 없앨 방안을 마련하라는 윤음을 발표했다. 정조는 이 윤음에서 “변화하면 통하고, 통하게 되면 오래간다(變則通 通則久)”는 ‘주역’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당대의 상황을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정조는 주나라에서 명나라까지 인재를 선발했던 방식을 개관한 다음 조선에서 시행한 각종 과거제를 열거했다. 그러나 과거제에 대한 정조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애초에 과거제를 시행한 의도가 좋았고 과거제를 통해 많은 인재가 선발되기도 했지만, ‘세상의 일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인재’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윤음의 마지막에서 정조는 과거제를 시행한 원래의 취지를 살리면서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 방안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정조는 장점이 있었던 제도로 추천제인 향거제, 시험 장소를 구분한 격옥제, 효성과 청렴함을 중시한 효렴제, 해를 나누어 경서와 역사서를 시험한 분년제를 거론했는데, 이들의 장점을 아우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때 정조는 전반적인 개혁정치를 꿈꾸면서 가장 먼저 과거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학 입시에 입학사정관을 도입하는 방안을 놓고 논란이 많은 요즈음이다. 정조의 말처럼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논란이기를 희망한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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