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여성 과학자
59 여성 과학자
  • 신동희(과학교육) 교수
  • 승인 2009.08.05 10:20
  • 호수 1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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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이 처음 제정된 때는 1910년이다. 우리 나라에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인 ‘한국여성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한 것이 1984년이었니, 다른 나라에 비해 꽤 뒤늦었다. 뒤늦게 시작되었지만 우리 나라의 여성계는 빠르게 발전을 거듭해 ‘호주제 폐지’ 등 굵직한 사안을 추진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존의 것을 바꾸려는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기 마련이다. 수 천년 동안 당연히 누려온 것을 넘보는 여성 운동에 대해 남성들이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7~18세기에 걸친 서유럽의 시민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탄생하면서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지만, 이 때 ‘모든’ 국민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일제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서구 여성 운동사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투쟁의 과정 없이 1948년,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참정권을 획득한 지 불과 60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활동은 놀랄 만큼 확대되었다. 이전 수 천 년 동안 여성들의 능력이 발휘될 수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유독 여성이 저대표되는 영역은 과학 기술계다.

생각나는 여성 과학자는 퀴리 부인뿐이니 말이다. 역사 속에서 여성 과학자가 이렇게까지 고갈된 것은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고 과학자 집단에서 여성을 배제시켰던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유럽 대부분의 대학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여성에게 입학을 허가했다. 17세기 이후 생긴 과학자 단체들이 여성 과학자를 받아들인 것도 20세기 들어서였다.

특히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퀴리 부인을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최초의 여성 회원을 선출한 것이 1979년이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19세기 이전에 활동했던 여성 과학자들을 가까스로 발굴해 그들의 삶을 파헤친 과학사 자료를 보면 과학 기술계에서도 여성의 고난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정규 교육도 못 받고 과학 단체에도 정식으로 참여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조수로 연구 활동을 하거나, 익명으로 책이나 논문을 출판했다. 마리아 메리안, 에밀리 뒤 샤틀레, 라우라 바씨, 마리아 빙켈만 등의 여성 과학자 이름이 알려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19세기 말, 여성에게도 대학의 문호가 열리면서 여성 과학자들의 사정은 조금 나아졌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히고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노벨상을 빼앗겼던 로잘린드 프랭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물리화학연구소에 출입이 금지되어 지하실에 위치한 청소부들의 출입문으로 드나들며 온갖 수모를 겪은 핵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의 사례는 당시 여성 과학자라면 누구라도 겪어야 했던 차별의 단편일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20세기 후반 들어서다. 과학계에서 여성이 제대로 활동하게 된 역사가 이렇게 짧은 것에 비하면 오늘날 국내외 여성 과학자의 활약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그러나, 연구 활동에서의 잠재성을 가진 여성 과학자가 과학 기술 관련 제도권에서 정식으로 자리잡기는 여전히 힘든 상황임을 알려주는 통계 자료를 보면 아직 갈 길이 더 남은 것 같다.

신동희(과학교육) 교수
신동희(과학교육)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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