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 속에서 아주 익숙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인지할 때가 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면들과 대면할 때가 특히 그렇다. 농경 공동체적 삶의 공간화법이 그려내는 유토피아의 모습과 포디즘적 대량 기계생산체제의 산업 공간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과연 양립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두 개의 공간은 두 개의 세계로 나눠진다. 이 두 개의 공간-세계는 합치되지 않는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공간과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의 <미래소년 코난>은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다룬다.
작가는 이 두 개의 공간이 양립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여기에는 물질-산업생산체계에 대한 은근한 편견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더스트리얼의 레프카 일당은 원로원을 제압하고 일방주의적 공간정책을 펴나간다. 이 정책의 핵심은 노예계급을 규정하여 얻은 착취된 노동력을 이용하여 도시의 공업산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때 노동-하급민은 이마에 낙인이 찍혀지고 상부세계와는 철저하게 구획된 지하세계-동굴같은 사회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한다. 레프카 일당이 추구하는 것은 산업사회가 추구하는 자본의 재창출을 위한 시장활동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군사적 행동을 해나가는 것은 적과 대결 우위를 점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는 괴멸하여 생존자들의 구역은 인더스트리얼과 하이하버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이하버는 아무런 군사시설 및 전투방어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가 작가의 편견이 드러나는 시점이다.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대결양상은 고작 레프카 일당이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라오박사를 이용하기 위해서 라오박사의 딸인 ‘라나’를 납치하려는 시도일 때뿐이다. 여기까지는 대결양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라나의 동료들은 어린 아이들인 ‘코난’과 ‘포비’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군사적 대결은 실재하는 전선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대량무기 생산라인이 필요하며 군국적 교범체계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악당의 세계로 그려진 인더스트리얼은 노예계급제만 빼놓는다면 모든 활동이 단지 생존을 위한 자구책의 일환처럼 보인다. 레프카 일당은 마음만 먹으면 하이하버를 파괴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으며 하이하버의 녹지대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철저하게 이분화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두 분류의 각기 다른 생존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하이하버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가지고 인더스트리얼(이 이름 자체가 풍기는 산업주의에 대한 일종의 편견!) 이 가지고 있는 산업체계적 공간패턴의 조건을 정치적 일방주의를 덧씌워 ‘악’한 것으로 몰아간다. 이런 식의 도식화가 혹시 현대 지구상에서 펼쳐지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필자는 산업주의를 맹신하는 선전가인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너무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해마시길, 이것은 공간이 문제라기보다는 세계관이 문제이기 때문에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이다. 논점은 항상 사물에 대한 견해에서 출발한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