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08.13 19:29
  • 호수 12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몸과 그림자의 관계 같던 영조의 죽음에  자신을 길에서 어미 잃은 어린아이 같다 표현


해 저무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어미를 잃고 방황하며 울부짖으니 천지가 아득합니다. 옛날부터 산 사람의 슬픔 중에 이보다 절박한 것은 없으니, 소자가 갑자기 이런 지경에 놓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략) 소자는 천성이 노둔하고 재질이 낮아 늘 짐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우리 대행(영조)께서는 소자의 부족함은 모르시고 종묘사직을 부탁하셨으며, 정일(精一)의 전통과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쳐 인의와 도덕의 방향으로 인도하셨으니, 마음에 잊지 않은 것은 소자 하나였지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자애로 감싸고 인애로 돌보심이 이처럼 깊고 절실했는데, 소자는 그 때 극도로 감동하고 기뻐할 줄만 알아 무궁한 즐거움이 만년이나 계속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아, 대행께서는 어째서 이런 은혜와 사랑을 끊어 버리고 저승에서 놀기를 재촉하셔서, 소자를 길에서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가 되게 하십니까? (중략)
지난 을유년(1765) 겨울에 소자는 수십 일 동안 병을 앓았습니다. 우리 대행께서 걱정하고 애 태우느라 침식을 잊으셨는데, 궁궐의 건물 사이를 서성이고 한밤중에 기도하면서 소자가 있는 줄만 알았지 성궁(聖躬)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보령은 이미 칠십을 넘겼는데, 소자는 융숭한 은혜에 힘입어 비록 병상에서 일어났지만 성궁은 피곤함을 보이셨습니다. 과연 병술년(1766) 봄에 몸이 편찮더니, 이때부터 지금까지 몸조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대행의 자질은 천지와 같이 유구하고, 헤아림은 일월처럼 선명하여, 천년만년 끝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병술년 질병이 오늘날 근심의 근거가 되었으니, 소자의 지난날 병이 혹 병술년의 빌미가 된 것은 아닌지요. (중략) 아아, 지극한 슬픔은 수식할 글이 없고 지극한 정은 표현할 말이 없으니, 그저 하늘에 사무치는 통곡과 땅에 사무치는 눈물이 있을 뿐입니다. 오호 통재라.

조선 국왕의 국장 행렬.

1776년 5월에 정조가 작성한 ‘빈전에 직접 향을 올리는 제문(殯殿親進香文)’인데, 여기서 ‘빈전(殯殿)’은 영조의 시신을 모신 궁궐 내의 건물을 말한다. 이때는 정조가 즉위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으로 궁중에서 영조의 국장이 진행되고 있었고, 현재의 동구릉 자리에 영조의 장사를 지낸 것은 7월말이었다.
윗글에서 정조는 자신을 해가 저무는데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세상에 태어나 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영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신세가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막막한 심정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영조와 정조의 관계는 일상적인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를 넘어섰다.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하면서 영조는 정조의 아버지 역할까지 떠안아야 했고,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훌륭한 국왕으로 키우기 위해 손자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는 자신이 십여 년 전에 병을 앓았을 때 영조가 손자의 건강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모습을 소개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만큼 컸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자책하는 의미도 있었다.
손자인 정조가 할아버지를 모시는 태도도 각별했다.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을 때 옆에서 부축했고, 누울 때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렸다. 식사할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올렸고, 움직일 때는 지팡이와 신발을 대령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정조는 내쉬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 몸과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고 했다.
영조의 사망과 함께 국정 운영의 책임은 정조에게로 넘어갔다. 제문의 마지막에서 정조는 어지러운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며, 고통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한다고 밝히면서, 글이나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슬픔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전직 대통령의 국민장이 거행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정조가 할아버지를 위해 지은 제문을 소개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