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 동안 지속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이미지는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매개물이었다
1960년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예술진영은 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세계적인 스타이자 아이콘이 되어버린 앤디 워홀(Andy Warhol)은 1964년 그의 동료들을 이끌고 새로운 필름작업에 돌입하였다. 앤디워홀은 거대한 뉴욕의 공간, 그 마천루의 정경 속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뉴욕시 맨해튼 34번가에 장중하게 서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102층, 높이 약 450미터의 이 거대한 구조물을 향해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촬영하는 작업이었다. 앤디 워홀은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 진영의 대부 조나스 멕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촬영할 거야. 내러티브는 없어. 그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소에서 밤새도록 찍겠어.(앤디 워홀)” 앤디 워홀에게 많은 질문 쏟아졌지만 가장 흥미로우면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하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찍겠다는 거야?”, 앤디 워홀은 너무나 당연한 이유를 왜 묻느냐는 투로 대답하였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스타(Star)니까.”
7월의 어느 밤, 앤디 워홀과 그의 작업팀은 록팰러 재단이 있는 라이트 빌딩 위로 올라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촬영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된 촬영.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었다. 작업팀은 계속해서 필름롤을 갈아 끼웠으며, 카메라의 필름롤을 돌리기 위한 전력공급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전기발전기를 돌렸다. 이렇게 완성된 영화 <엠파이어>는 러닝타임이 장장 8시간에 육박하는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이 영화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3월. 첫 시사회에는 수백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스크린 위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야경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것이 전부였다. 서사는 없었으며, 사운드의 변화 역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앤디 워홀은 1초에 16프레임 상태로 필름을 완성시켰다. 즉 같은 전경이기 때문에 눈치를 챌 수는 없었지만 이미지의 시간을 늘린 것이다. 영화의 기본 프레임이 1초당 24프레임이기 때문에 프레임 길이를 짧게 하는 것은 장면이 담고 있는 시간을 늘린다는 뜻이다. 관객들 중에서는 트랜드에 민감한 아트필름 팬들이 많았는데 고정된 피사체의 장시간 상영이 가져다 주는 지루함에 그들은 질색했다. 이들은 하나 둘씩 극장을 빠져나갔다. 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관객의 수는 줄기 시작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관객들은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외부에서 간식을 사다가 먹기도 하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의 극장 안은 토론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러티브가 날아가 버린 장면화에서 남은 것은 빌딩을 감싸고 있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극장 안에서 사람들은 영화에서 집중할 것이 사라지자 긴 상영시간을 채울 무언가를 붙들어야 했다. 그것은 시간 그 자체였다. 관객은 시간을 붙들기 위해서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기 시작하였고, 먹을거리를 사다가 먹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을 채우기 위한 여러 시도들로 인해 극장 안은 오히려 활기를 띄었다.
앤디 워홀은 뉴욕 공간의 스타인 엠파이어를 바라보라고 관객들을 등떠 밀었지만 그것은 실험을 위한 빌미였고 연출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사실은 맥거핀이었다. 빌딩은 실체가 있는 피사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마천루의 정경을 대표하는 허구적 사물이었고 그 도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시간에 대하여 사유하게 만드는 매개물이었다. 처연한 밤의 빌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었고, 사유의 끈이 되었으며, 시간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였다. 창발적 사고의 틀이 되어준 이 작업은 표면적인 것 이면의 속성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해프닝이 되었다. 우리들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자리는 표면인가, 이면의 속성인가. 아니면 그 자체의 시도 조차 꿈도 꾸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