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게 관찰하여 연관짓고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두껍게 관찰하여 연관짓고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9.08.19 15:43
  • 호수 1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대학교 마동훈(언론학) 교수

 우리나라 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은 원인을 찾아 분석하는데 익숙하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창조적 사고는 부족하다. 왜 그럴까? 고려대학교 마동훈 교수는 인문학이 경시되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 속에서 과학주의적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보완’이 필요할까? 단대신문이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보완 우리나라 사회과학은‘질적 연구방법’에 비해‘양적 연구방법’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속지학적 연구나 문화연구 등과 같은 표현이 낯설기도 한데요, 질적 연구가 어떤 것인지 간단한사례를 통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흔히 역사라는 것을 말할 때‘제도사’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의 권위(권력)로 인정받은 역사가들이 기술한 이야기들이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 등장하고 논문에도 등장하면서 역사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 전공 분야가 미디어와 대중문화라는 것인데, 미디어의 생산자 측면에서의 역사가 있다면 소비자 측면에서의 역사는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미디어 연구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제도사적 연구가 진행되다 보니 TV나 라디오를 보고 듣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잖아요. 이런 연구 방법이 과연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고, 또‘우리의 앎’에 영향을 끼친다는 역사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흔히 알고 있는 60년대 KBS의 역사를 예로 한번 들어볼게요. 이 당시 KBS 라디오 담당자의 이야기를 듣거나 편성표만 본다면, KBS의 프로그램들이 농촌의 주부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촌 주부들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 토크 쇼, 드라마 등이 편성표 상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60년대 KBS 라디오는 농촌 주부들을 위한 매체였다’라고 기술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역사를 가만히 보다 보면 당시 농촌 주부들이 실제로 라디오를 통해 삶의 위안을 받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아요.

 이유는 뭘까요? 그 당시 한국 방송의 역사를 농촌 지역에 가서 쓰지 않는 역사기술의 관행 때문입니다.
실제로 60년대 농촌 주부들은 그렇게 정해진 시간에 라디오 들으면서 KBS가 제공하는 정보나 교양 프로
그램을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거든요. 농사 일하면서, 애들키우면서, 거기에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
에서 라디오라는 것을 들으며 오락과 교양과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로 여겨지던 시절이죠. 즉, ‘60년대 KBS 라디오는 농촌 주부들을 위한 매체였다’는 것은 하나의 슬로건이었지 실제 팩트(fact)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기존의 역사 방법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료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라면, 그 사료가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역사의 한 축으로 보완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객관화 하기란 힘들 겁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 인류학에서 나오는 개념이‘두껍게 관찰하고 두껍게 기술하기 전략(thick description)’이에요. 일반 사람들의 구술이나 일기 등을 통한‘현장사료’들을 기존에 나와 있던 제도사적 사료들과 맞춰 보며 객관화 할 수 있을만한 자료인지 검증하면서 아주 두껍게 그 배경들을 기술해 주는 방법입니다.

 방법론적으로 한계는 있겠지만, 저는 이런 방법이 기존의 역사 연구 방법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이후에 절대 다수가 된 대중(수용자)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역사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찰력 교수님은 인문학이 아닌 언론과 영상을 전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전공 학문에 있어서 인류학(또는 사학과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80년대 초반에 이쪽 분야(매스컴)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는지, 어떤 논문들이 주로 나오고 있는지 본 적이 있거든요. 이 당시 가장 많이 나왔던 연구 주제는‘한국에서 AFKN의 소비와 문화 제국주의’라는 논쟁 이었습니다. AFKN을 본 다는 것은 우리의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영어를 공부하는 수단일 뿐인가 등과 같은 논쟁 말입니다. 그런 논쟁이 나온 배경을 보면, 마치 일제강점기 하에 우리는 전부 일본 사람이 됐다가 해방과 동시에 다시 한국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단편적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는 논쟁이거든요.‘AFKN이 한국을 바꿨다’는 식의 논쟁은, 단 하나의 거대한 원인이 특정 결과를 만든다는 단순한 인과관계적 해석입니다.

 역사라는 큰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많은 요인들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는 채 오늘의 우리 모습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이렇게 말 하는 버릇은 어디서 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라고 했을 때, 일일이 따져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제도사적 사료이던, 구술 사이던 우리가 모아 놓을 수 있는 가능한 많은 사료들을 조사해 놓아야 한다는 거죠. 그 자료들을놓고 우리가 관찰하려는 대상을 두껍게 기술하는 전략이 바로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적 연구방법이에요.

 프랑스 대혁명을 두껍게 기술 한 로버트 단턴의『고양이 대학살』의 예를 들어보죠. 제도사를 인용해 교과서가 설명하는 프랑스 대혁명에는 당시의 유럽 정치적 질서와 전근대적 질서가 무너지는 배경이 나와요.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시작해요. 개천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갈리는 작은 마을에 인쇄산업이 들어오거든요. 여기서 인쇄산업을 운영하는 귀족들과 일 하는 노동자들이 나뉘고, 거주지도 각각‘강북’과‘강남’으로 나뉘어서 살게 됩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이 잘 드러나죠. 그런데 이 당시 인쇄업이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산업이 아니었거든요. 노동자들이 월급을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귀족들은 강북으로 넘어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던 거예요.

 밤마다 노동자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며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말지 등을 논의하는데 귀족들이 키우는 살찐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더랍니다. 당연히 노동자들이 분노했겠죠. 자기들은 월급을 못 받는데 고양이들이 점점 더 살이 찌니까 말이죠.
 노동자 중에 한 명이 고양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화형을 시킵니다. 여기서 희열을 느낀 사람들이 고양이 학살을 시작하죠, 귀족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으로. 물론 귀족들도 분개했겠죠. 그래서 용병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노동자들은 그들대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이 작은 마을에서 개천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났죠. 그 소문이 파리까지 전해지고 파리에 있는 일반 노동자들도 분개하기 시작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사실 제가 읽어본 프랑스 대혁명 관련 사료들 중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글이었습니다.
 정의·평등·자유라는 이 아이디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화정을 하면서 제도사를 쓴 사학자들이 갖다 붙인 개념일 확률이 큽니다. 역사의 통찰력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통찰력은 팩트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고양이 대학살』의 팩트는 에피소드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에피소드들이 오히려 자유·정의·진리와 같은 큰 슬로건보다는 실제로 인간이 살아온 궤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통찰력을 설명하는 아주 구체적인 자료로 쓰일 수 있다는 겁니다.

 트리비엄 마지막으로 인문학, 특히 인류학이나 사학적 소양(전공적 지식이 아닌)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가치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공교육의 본질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인문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인과 관계적 설명을 요구하죠. 하지만 자극과 반응의 시각, 즉 원인과 결과의 시각은 사고의 단편화를 가져옵니다. 어떤 잘못된 결과가 있으면 그런 결과를 만든 원인을 찾아서 고쳐줘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는 거죠. 어느 학생이나 교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근대적 사고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할 수있습니다. 존 듀이의 실용주의와 과학철학이 만나 Y(결과)를 만든 X(원인) 찾기 식의 교육이 만든 사고 말입니다.

 트리비엄(triviu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 이래에 있었던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아주 전통적인 교육 방법인데요, 문법과 논리, 그리고 레토릭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법이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정보들을 모으는 단계입니다. 소방서란 무엇인지 사회의 각종 제도들은 무엇인지 등을 수집하는 단계죠. 논리는 그렇게수집한 정보들이 서로 어떻게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경찰서, 소방서, 선생님 등등의 정보들을 연결하는 과정이에요. 마지막으로 레토릭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연결된 정보들을 갖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고대에 있었던 인문주의적 교육방법입니다.
 하나의 결과에 얽혀 있는 무수한 원인의 장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입니다. 폭 넓은 독서와 폭 넓은 관찰(문법)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엮어서(논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레토릭)이 인문학적 교육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인문학적 교육이 쌓이고 쌓인다면‘이것이 주요 원인이다’라고 단선적으로 판단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바뀔 수  있겠죠. 인문학이 그런 보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준범 기자
박준범 기자

 psari@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