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시간을 거스르는 신비한 공간
⑮ 시간을 거스르는 신비한 공간
  •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09.09.15 17:44
  • 호수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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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근 모리트(上)

광활한 영토 위 따뜻했던 날들
몽골에 오면 눈이 맑아진다. 빛나는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 파랑과 초록이 조화롭게 배치된 공간 속에서 새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검붉은 가라말이 달려가고 느릿느릿 양 떼들과 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다.
희뿌연 도시 올란바트르를 벗어나 멍근 모리트 겔 캠프에 자리를 잡았다. 멍근 모리트라는 지명의 뜻은 은마(銀馬)이다. 은마라는 지명부터가 이 지역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푸른 초원과 협곡 사이로 수량이 풍부한 헤르네 강이 흐르고 있는 칭키스칸의 어린시절 놀이터였다거나 카한의 별궁이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풍광 좋은 지역이다.
한여름에도 겔 안은 시원하다. 짐을 모두 풀어 놓고 나무침대에 눕자 천창을 통해서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얗게 빛나며 흘러가고 있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졸음이 왔다. 짙은 풀 냄새가 가슴 속으로 가득 들어찬다. 시간이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 얼마나 잤을까 겔 안이 어두워졌고 천창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밖으로 나가니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한 낮의 더위는 다 어디로 갔는지 서늘하다. 스텝지역은 일교차가 크다는 것을 피부로 확인했다. 하지만 밤하늘 별들이 펼쳐놓은 황홀한 장관 때문에 으스스 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지평선 끝에서부터 머리 위를 지나 온 하늘에 가득 찬 별들로 백야의 밤은 찬란했다. 북극성,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카시오페아 자리, 세페우스자리, 기린자리, 용자리 유년시절 열심히 외웠던 별자리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컹컹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눈이 네 개처럼 보이는 몽골의 사나운 개들도 별구경을 나온 모양이었다.
칠월 멍근 모리트의 아침은 일찍 찾아온다. 측면으로 달려드는 아침빛 때문에 겔 캠프 옆에 있는 흉노의 적석총이 반짝였다. 가끔씩 청동 화살촉이 발견된다는 적석총의 돌무더기들 사이를 지나 소들이 물을 먹기 위해 강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과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광경이 새삼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소들의 이중창 소리가 들려왔다. 소 한쌍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린 왈츠를 추듯이 강가를 종행무진 누비며 지르는 소리였다. 사람에 빠진 소들이었다. 다른 소들도 힐끗거리기만 할 뿐 모르는 척 강가로 향하고 있었다. 영화 <워낭소리>가 떠올랐다. 자연스러움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데 사람들은 왜 자연을 인위적인 공간 속으로 재배치하고 있는지. 소들도 자유연애를 할 천부적인 권리가 있는 것인데. 저 멀리 헤르네 강이 반짝이고 있는 것은 저들의 이중창을 들었기 때문일텐데.
멍근 모리트에는 가슴이 따뜻한 생명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과 나누는 묵언(默言)의 대화는 끝이 없다. 유목민 겔에서 만난 앞니 두 개가 모두 빠진 소녀의 해맑은 눈동자와 낯선 이방인에게 아롤(치즈과자의 일종)과 수태차(우유차)를 권하는 할머니의 수줍은 미소 속에는 언어보다 강한 소통력이 있다. 꼭두새벽 황소들이 즐겁게 내지르던 사랑의 이중창과 조랑말의 조용한 눈빛과 깡총거리며 달려가는 양떼들의 몽실거리는 뒷 태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살고 있는 옛날의 그것이 담겨 있었다. 멍근 모리트에서는 우리의 시간이 거슬러 흐른다. 아니 비로소 정상적인 시간과 만날 수 있다. 멍근 모리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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