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대전차의>의 발문
<주자대전차의>의 발문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09.22 17:44
  • 호수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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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도는 주자에게서 크게 밝혀졌고, 주자의 글은 <주자대전>에 크게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공자의 도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주자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고, 주자의 글을 연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주자대전>에 힘을 다해야 한다. 아, 이것은 하늘이 우리 유학을 망하지 않게 하려고 육경(六經)과 그 공을 똑같이 하였나 보다. <주자대전>의 글은 땅이 온갖 것을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이 매우 방대하여 그 끝을 보기가 쉽지 않다. 비록 이리저리 전기(傳記)를 찾고 널리 사적(事蹟)을 참고해도 모든 것을 밝혀내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선정(先正)이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불세출의 큰 학자로 일찍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였고 주자의 글에서 힘을 얻은 것이 더욱 컸다. 그는 유배지에 있을 때 날마다 <주자대전>을 꺼내어 70여 권을 다 외웠고, 일찍이 선정이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편찬했던 <주서기의(朱書記疑)>라는 책에서 장단점을 따지고 다시 여러 자료를 찾아 세밀하게 분석하여 완전한 책을 만들고 <주자대전차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주자대전>은 해와 달처럼 밝아지고 단청처럼 빛나게 되었다.
<주자대전>을 읽는 사람은 이 책에서 판(板)을 따라 살펴서 조사하면 털끝만큼의 장애도 없을 것이다. 경전(經傳)에서 장구(章句)를 집주(集註)한 것과 서로 안과 밖을 이루니 아 후학들에게 훌륭한 지침을 내려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또한 선정께서 성조(聖祖, 효종)를 만나 대의(大義)를 천명하여 영원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글에서 연유한 것임을 증험할 수 있으니, 어찌 국사(國史)를 살피고 유고(遺稿)를 찾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겠는가?

1772년에 정조가 작성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발문(跋文)’의 전문이다. 이 때 정조는 세손의 지위에 있었는데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주자대전차의>는 송시열이 작성하고 제자인 권상하가 마무리한 책으로 <주자대전> 전체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575년에 조선에서 간행한 <주자대전>을 저본으로 하여 책판의 면수를 따라 어려운 구절과 단어를 큰 글자로 쓰고 작은 글씨로 그 뜻을 풀이했으며, 1716년에 교서관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했다.
이 글에서 정조는 공자를 제대로 알려면 주자의 글을 모아둔 <주자대전>을 보아야 하는데,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하므로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날마다 <주자대전>을 읽어 내용을 전부 외웠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해 이황이 작성한 <주자서절요기의>를 참고하고 다른 서적들을 조사하여 완전한 주석서인 <주자대전차의>을 작성했다. 따라서 앞으로 <주자대전>을 읽는 사람들은 <주자대전차의>에 있는 주석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읽어나가면 되니,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 주석본이 있듯이 <주자대전>의 주석본으로 <주자대전차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정조는 송시열의 의리론도 이 책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 17세기 후반에 송시열은 효종을 만나 북벌(北伐)을 주장함으로써 청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명분을 뚜렷이 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은 남송 시절에 금나라를 원수로 여기던 주자의 글에서 나온 것으로, 송시열은 <주자대전차의>를 작성하면서 북벌론을 굳혔다는 것이다.
이십대의 정조는 송시열이 작성한 주석을 통해 주자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결국은 공자로 표현되는 유학을 제대로 이해할 것으로 보았고, 조선후기의 국시였던 북벌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변통을 하더라도 국정의 기본 방향은 유지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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