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만을 위한 예술’ 아닌 ‘삶을 위한 예술’ 되어야”
“‘예술만을 위한 예술’ 아닌 ‘삶을 위한 예술’ 되어야”
  • 고민정 기자
  • 승인 2009.09.22 21:10
  • 호수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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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과 소통 되지 않으면 예술은 무의미

올해로 등단 40주년 이시영(문예창작·초빙교수)시인
"70~80년대는 시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가 일치된 보람있고 행복했던 시기"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하여 현재 우리대학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는 이시영 시인을 만나봤다. 한국 리얼리즘 시 진영의 든든한 기둥격인 이시영 시인은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70~80년대 치열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시 속에 담아온 시인으로서 현실과 멀어진 문학에 대한 섭섭함을 이야기하고 사회와 예술이 다시 소통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들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원래 시조로 등단하였는데 저항시를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는 시대가 미친 영향이 있나요?
  등단한 시기가 호시절이었다면 저도 정연된 예술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는 호시절이 아니고 투쟁의 시기였기 때문에 유신체제하의 긴급조치로 인해 모든 사상의 표현이 억압되었습니다. 또 독재정권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보다 정의롭고 절실한 문학들이 긴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조는 정연된 양식이라 아름답긴 하지만 그 시대의 모든 억울함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항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만약 당시가 일제치하였다면 저는 독립운동을 한다든지 저항시를 쓰면서 이육사 같은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만큼 사회가 문학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은데요, 사회에서 예술의 파급 효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당시에는 ‘겨울 공화국’이란 표현만 써도 걸리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술작품이라거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1970년 박정희 정권의 독재체제에 의연히 맞서오던 김지하가 당시 부정부패의 주범들을 ‘오적’이라 규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통쾌하게 풍자한 시 <오적>이란 작품이 『사상계』 5월호에 발표 됐을 때 박정희 정권은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한 것’이라 하여 김지하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투옥시켰습니다. 이 시가 실린 『사상계』도 판매금지 시키고 저를 포함한 그 사건과 연관 된 모든 사람들이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결국 당시 진보적 잡지였던 『사상계』는 <오적>으로 인해 그해 9월 폐간됐습니다. 이를 ‘오적필화사건’이라 부르는데 이 사건으로 여·야 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시인 김지하는 일약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이 세계에 알려지자 세계적인 작가들이 김지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해 그 뒤 김지하는 1980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회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잘못된 사회 제도가 예술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고 예술이 창작물을 통해 모든 민중을 대신해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민중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용산참사나 쌍용차 사태 등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이런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젊은 문인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용산참사는 우리시대 가장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근래에는 『창비』 주간논평을 통해 이 사건을 다룬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시를 써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수록 예술의 사회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독재정치가 정복한 시대여서 목숨을 내놓고 글을 썼던 70-80년대에 비해 요즘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시절이고 표현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처럼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시를 잘 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왠지 그런 시를 쓰면 촌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 사회적 메시지는 거세된 채 개인의 미묘한 감정에만 빠져 글을 쓰는 젊은 감각파 시인들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감각파 시인들에게 옛날 시인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할 순 없지만 글 자체에는 사회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단순히 예술을 정치적 메시지나 저항의 수단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저급 평가하는 시대풍이 일어나서는 더욱 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문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용산참사에 대항하는 피켓 시위를 열며 몸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참여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식은 70~80년대와 많이 달라졌지만 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젊은 문인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낍니다. 예술에서 정치성이 빠져버리면 당대의 전제부위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사회와 예술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세월이 민주화가 되었으니 느슨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민주화는 반드시 후퇴하게 되어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에 당면한 때인 만큼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라는 작품에서처럼 선생님의 시에는 기사의 내용을 인용한 듯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에서 서정성을 배제하고 기사화해서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간혹 젊은 시인들이 ‘선생님의 시는 너무 직접적이지 않습니까?’하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찬반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기사지, 시냐?’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직접적인 비판이 주는 충격 때문에 신선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 속에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는 이유는 색다른 표현 방법을 통해 예술적 가공보다 강한 현실의 충격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했던 가자지구 사태를 다룬 <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라는 작품도 현실비판 시인데 이렇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순적인 현실의 기사를 잘라 가공해 액자처럼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 예술적 가공을 가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나라 국민을 경찰을 투입해서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사과 한마디 없는 정부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브라보를 외치는 유태인들에 대한 비판을 시로 쓰는데 기사 이상의 직접적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어떤 예술이 환영받을까요.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등 다양한 작품이 있어야 하지만 이런 실상에서는 예술이 더 고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전성기였던 70~80년대에 비해 요즘은 시 또는 다른 예술작품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술과 사회가 다시 소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예술이란 철저한 사회적 소산물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회운동 세력과 긴밀한 관계에 있어왔습니다. 시의 시대라고 불리는 70~80년대를 지나 사회운동으로서의 예술이 급격히 무너진 것은 89년 동독이 무너지면서입니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예술의 사회적 권능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와서는 감각파·미래파 작가들이 득세하며 시와 세상과의 소통불능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감각파나 미래파 젊은 시인들이 멋들어진 언어들만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 시인들도 잘 모르겠다는 평이 많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정제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사람들과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예술적 언어가 곧바로 일상의 언어로 번역이 된다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그래도 시란 서로의 깊은 대화 양식인데 의미는 통해야지 의미가 불통한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봅니다. 70~80년대 시가 사회와 너무 밀접해서 탈이라면 요즘은 너무 단절되어 탈이라 생각합니다. 세상과의 단절은 곧 독자들을 멀어지게 하며 하물며 예술의 가치와 의미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술이 사회적 현실에 대해 거리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현실에 대해 시인들이 많이 저항하고 창작품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이 증대 되고 멀어졌던 독자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삶을 위한 예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80년 편집장으로 창비에 들어간 이후에는 고초가 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한 이후 안기부에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기도 하고, 1989년 계간지 겨울호에 황석영 방문기를 게재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는데 그런 혹독한 시간을 겪으면서도 전언으로의 예술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당시 문학운동을 할 때에는 시 한편을 발표할 때 마다 잡혀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한 사회운동은 민중의 큰 전위역할을 이뤘습니다. 그만큼 구속된 사람도 많고 조태일의 『국토』, 신동엽의 『금강』,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 많은 문학작품들이 판매금지도 수없이 당하며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가 일치되어 보낸 엄혹한 시절은 지금 와 생각해보면 보람 있고 행복했습니다. 힘든 시기를 버틴 원동력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유에 대한 목마름과 정의에 대한 신뢰, 참다운 예술에 대한 제 나름의 지향성입니다. 저는 언제나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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