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게시판 ‘한 줄’의 무게
민원게시판 ‘한 줄’의 무게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9.09.29 16:46
  • 호수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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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이명박이 어떻고, 정운찬이 어떻고, 정세균은 또 어떻고 등등, 한창 공인들을 술안주로 떠들다 보면 누군가 한 명은 꼭 이런 말로 분위기를 깬다. “여기서 이런 말 하면 뭐하나. 우리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술이나 마셔.”

하버마스(Juergen Habermas)가 함께 술자리에 있었다면, 자신이 50년 전에 했던 분석이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그가 사회 공론장이 붕괴됐다는 주장을 한 것이 1962년의 일이니 말이다. 그 후 50년 가까이 수많은 학자들은 하버마스의 견해를 지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화 된 신문과 개인화·파편화된 군중(crowd)을 비판했다.

언론도 문제지만 개개인의 정치적 무관심과 참여 의식 부재가 공론장을 붕괴시켜, 결국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의 방관자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과 정치를 하는 ‘엘리트’가 나뉘는 공론장의 재봉건화(refeudalization)가 야기됐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관점은 대학에서조차 비슷하게 적용된다. 술자리에서 직원들의 불친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과 공분을 느낀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직접 가서 얘기해도 될까 말까 인데, 여기서 이런다고 누가 들어주냐?”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것도 비슷하다.

대학이 하나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취업을 위해 공부하는 ‘대학 이용자(학생)’와 ‘서비스 제공자(교직원)’로 분화되며 공론장이 재봉건화 되는 양상도 비슷하다. 대학 구성원의 일부로 ‘참여’하기보다는 등록금 낸 만큼 이용하려는 ‘이용자’와 월급 받은 만큼 일 하는 ‘제공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며칠 전 총학생회가 마련한 ‘민원 게시판의 날’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솔직히 단대신문 기자들이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들을 취재하며 느낀 바는 ‘민원은 민원일 뿐, 학생 대다수의 여론이라 보기 힘들다’는 것이 대학 행정의 마인드다.

평소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대학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민원이 개개인의 단순 불평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공청회를 연 적도, 공개적으로 토론을 한 적도 없으니 총학에서도 ‘그것이 여론인가?’에 대한 대학 측의 질문에 시원하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측에 ‘그래도 공론장은 붕괴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전처럼 집회도, 구호도, 투쟁도 사라진 대학이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사교적 대화’를 나눈다. 커피숍, 학생식당, 호프집, 그리고 강의실에서 사교적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학 행정을 말하고 토론하며 숙의한다. 공론장 개념이 변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측이 이러한 관점으로 민원 게시판에 나온 ‘한 줄’의 무게를 가늠해 줬으면 한다. 그런 토양이 다져졌을 때, “우리가 이렇게 떠들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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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ari@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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