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가 김용규, 철학을 말한다(上)
자유기고가 김용규, 철학을 말한다(上)
  • 박준범 기자
  • 승인 2009.10.15 20:11
  • 호수 12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물과 사건의 의미와 가치 알아내는 것이 철학
대학은 ‘두루 아는 보편인’을 키우는 곳 독일에서 ‘전문 지식인’은 ‘하나만 아는 바보’라는 뜻

“나는 그렇게 나설만한 사람이 아닙니다”며 인터뷰 요청을 사양하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의 저자 김용규 씨는, 결국 “철학과 없는 종합대학인 단국대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까지는 거절하지 못 했다. ‘취업 문제’에만 매몰돼 인문학적 가치를 잃고 있는 요즘 대학(생)들에 대한 김용규 자유기고가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지난달 26일 김용규 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자택에선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0년 전 50만원을 주고 산 오디오라 스피커 한 쪽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다”며 응접실로 다과와 커피를 내오는 김용규 씨는 스스로를 ‘전업주부’라고 소개했다. “저는 불편한 거 싫어합니다. 보내주신 질문지에 대한 답변은 이미 정리해 놓았으니, 그냥 편안하게 대화나 나누다 가시죠.”

급하게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려는 기자에게 A4 4장으로 정리한 ‘숙제’를 내미는 김용규 자유기고가 앞에서 왠지 ‘필기’를 한다는 것이 결례로 느껴져 펜 뚜껑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기억에서 지워질까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급하게 정리한 취재수첩의 내용들과 A4 4장으로 정리된 ‘숙제’들을 모아 소개한다.

▲바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관 옆 철학카페』 등을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후, 늘 어렵게만 느껴지던 철학에 쉽게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후 ‘그래도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도서관에서 아무 철학책이나 집어 들었다가도 이해하기 힘든 번역투와 선문답 같은 말들로 인해 ‘역시 나는 아닌가보다’라는 생각만 할 때가 많았거든요. 어쩌면 ‘쉽지 않은 학문의 영역’에서 그 위치를 지킬 수도 있는 철학을 대중문화와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떤 계기로 이런 시도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내 생각엔 철학은 잘 만 받아들이면 여전히 우리의 삶과 사회를 크게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철학이 우리 삶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가 철학이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가 이런 말을 했어요.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모르면, 그것은 철학이다.”

철학이 어렵다는 것을 비꼬는 말이지요. 철학이 이렇듯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 할 때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이야기하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우리는 보통 구체적인 예가 있어야 뭐든 쉽게 이해하거든요.

사랑을 예로 들자면, ‘사랑이란 상대를 배려하는 이타적인 마음이다’라는 말보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이몽룡과 성춘향의 이야기를 통해서 더 쉽게 이해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을 자주 철학과 접목시키지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를 제공함으로써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 주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책 곳곳에서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급진적 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삶과 앎은 상호 순환적이기 때문에 개인은 앎에 대한 무제한적 책임을 져야 하고, 그러한 앎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인지적 순환’을 언급하셨는데요, 요즘 제 주변의 학생들을 보면 ‘앎’에 대한 개인의 노력이 참 열성적입니다. 방학 중에도 대학 도서관 열람실이 가득 찰 만큼, 또는 방학을 이용해 어학연수를 다녀올 만큼 ‘무언가를 알기 위한 노력’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앎’의 노력이 ‘취업’위주로 맞춰져있다 보니 당장 눈에 보이는 가치만을 좇을 때도 많습니다. 작가님께서 보시기엔 지금 대학생들이 놓치고 있는, 그래서 언젠가는 ‘책임’을 져야 할 ‘앎’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철학은 지식이라고 하지만 더불어 지혜라고도 하지요”
- 이야기 하나 할까요? 옛날 어느 먼 나라에 꽃을 아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궁궐 안의 많은 정원들을 화단으로 만들고 수천가지 진귀한 꽃들을 구해 심었지요. 매일 물을 주고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님이 멀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지요.

임금님은 꽃들이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 가운데 가장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골라 각각의 꽃들에게 물을 주는 여러 가지 까다로운 방법들을 일일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물을 주고 자식처럼 잘 돌보라고 명령하고 떠났지요. 충직한 신하는 임금님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꽃들에게 물을 주고 가진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우기가 되어 날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충직한 신하는 매일같이 화단에 나가 비를 맞으며 정성껏 물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마침내 임금님이 긴 여행에서 돌아왔지요. 임금님은 화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귀한 꽃들이 모두 뿌리가 썩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임금님은 크게 노하여 그 신하를 엄하게 벌하고 궁에서 내쫓았습니다.

이 신하의 잘못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는 수천가지 다른 종류의 꽃들에게 물을 주는 까다로운 방법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화단에 나가 그 방법을 따라 물을 주었지요. 지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신하는 자기가 하는 행위가 지닌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도 화단에 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지혜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그 신하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마주 대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의 의미와 가치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보통 과학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를 자연과학이라 하고,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를 사회과학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결과를 지식이라고 합니다. 자연과학 지식 또는 사회과학 지식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어떤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 더 넓게는 인문학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죽는다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과학이지요. 그러나 그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내는 것은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지식이라고도 하지만 또 지혜라고도 하지요.

그렇다면 꽃밭에 물을 주라고 했다고 비 오는 날에도 물을 주는 신하의 이야기는 왜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또는 인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훌륭한 교훈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 신하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지식이라는 앎은 많이 쌓았지만 지혜라는 앎이 없는 사람 말이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대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뿐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가치도 항상 함께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학생들의 ‘앎의 방향’이 획일화 되는 이유도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의 기준과 맞물려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말을 쓰기 보단 ‘연봉 얼마 받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 합니다. 즉, 대학에서도 물질(화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매스컴을 통해 매일 보고 듣는 것들이 위와 같다보니 ‘인지적 순환’에 의해 학생 개인의 ‘앎’과 판단의 기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이 사회의 변화와 흐름에 맞춰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화 역할을 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대학이라는 구성체(조직)가 사회와 학생들 사이에서 해야 할 역할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용규 자유기고가는?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 신학을 전공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데칼로그』, 『설득 논리학』 등의 저서가 있다. 핸드폰과 자동차 그리고 명함은 없다.
- 오늘날은 전문인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려고 노력하며 또한 되어야만 하지요. 따라서 대학은 그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전문인이라는 게 뭡니까? 전문인이란 기술자, 과학자, 관리자, 경영자, 의사, 법률가, 디자이너 등과 같이 ‘도구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가진 이성을 ‘도구화 된 이성’이라고 하지요.

이들의 힘은 실용성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인의 활동은 그 본성상 개인적이며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거시적 전망이 없지요. 여기에 현대인의 삶과 이들이 중심이 되는 현대사회의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대학을 영어로 University라고 하지 않습니까? universe는 우주, 전 인류, 보편성 등을 뜻합니다. 즉, 대학은 하나만 아는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두루 아는 보편인’을 키우는 곳입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전문 지식인’이 ‘하나만 아는 바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학은 전공만큼 힘든 부전공을 2개나 이수하게 합니다.

또 이야기 하나 할까요? 조금 전에 한 꽃밭에 물주라고 했다고 비 오는 날에도 물을 주는 신하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내가 만든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며 <계몽의 변증법>을 쓴 호르크하이머가 그의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한 이야기지요.

호르크하이머는 어떤 운전사가 오직 교통법규에 따라 운행하기 위해 무단으로 도로를 횡단하던 어린이를 치었다고 하자는 거예요. 이때 그 운전사를 이끈 것이 ‘도구화 된 이성’이지요. 호르크하이머는 그 운전사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운전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가 단지 교통법규대로 운전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성이란 목적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성은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며 또한 그 모두를 비판하는 능력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화단에 물을 주라고 했다고 비 오는 날에도 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호르크하이머는 현대사회를 횡행하는 광기와 야만성이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지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도구적 이성은 규범의 상실, 이념의 상실, 가치의 상실과 사물화를 가져온다고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아우슈비츠였다는 거지요.

따라서 이성이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화 된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것’만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했지요. 나는 대학은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계몽’뿐 아니라 비판정신을 가르쳐 ‘계몽을 계몽하는 일’도 당연히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개인도 행복해지고 사회도 건전해지지요.(계속)

박준범 기자
박준범 기자 다른기사 보기

 psari@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